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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비밀의 햇볕본 것/영화 2024. 11. 7. 19:31
밀양, 비밀의 햇볕
죽은 남편의 고향에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밀양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차가 말썽이 되어 간신히 도움을 받게 된 신애(전도연)는 밀양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종찬(송강호)를 만나게 된다. 고장이 난 차를 고치지 못하고 결국 종찬의 차를 타고 함께 밀양으로 향하며 신애는 밀양에 관해 묻는다. 종찬은 밀양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설명을 늘어놓지만 대답이 썩 맘에 들지 않았는지, 신애는 종찬에게 밀양의 뜻을 아느냐고 재차 묻는다. 신애는 밀양은 비밀의 햇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며, 참 예쁜 이름이라고 말한다. 극이 전개되며 비밀의 햇볕이라는 참 예쁜 이름은 신애에게 끝까지 예쁠 수 없는 이름이 되고 만다. 밀양의 의미는 영화의 서사를 따라 급격히 변화한다.
비밀의 햇볕이라는 이름 자체가 참으로 묘하게 느껴졌다. 비밀이 갖고 있는 어둡고 은폐된 이미지가 햇볕과 함께 쓰이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해가 닿는 곳은 환하게 밝혀지기 마련인데 그 곳에 비밀이 있을 수 있는 걸까? 뭔가 알 수 없는 미스터리를 느끼고 나는 이 비극 속에서 밀양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었다.
밀양, 숨기려 해봐야 숨길 수 없는
밀양이란 이름을 듣고 들었던 내 첫 생각처럼 해가 닿는 곳에 비밀은 없었다. 밀양은 비밀이 없는 동네였다. 작고 좁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모를 수 없다. 새로운 얼굴의 등장, 심지어 죽은 남편의 고향을 찾아온 서울 출신 과부라니, 이 동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엔 이만큼 자극적인 일이 있을까. 신애는 저도 모르게 자신에 대한 온갖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경계심과 저항심이 차오른다. 분명 자신을 알지도 찾지도 못하게 아무도 자신을 알 수 없는 곳을 찾아 들어온 밀양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다.
잘 지내보려는 마음으로 인테리어를 고쳐보라는 조언을 했던 양장점 아줌마는 ‘처음 보는 서울 여자가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으면 가게가 망할 거라는 소릴 했다’며 신애를 이상한 여자로 뒷담화를 늘어놓았다. 그것뿐인가. 신애가 운영하는 피아노학원 맞은 편, 스스로를 김 집사라고 소개하는 약국 아줌마는 남편 잃고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과부로 여겼다. 잔뜩 털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것도 지쳐버렸다. 신애의 소중한 아들 준을 위해서라도 이미 자리 잡은 이곳 밀양에 어떻게든 적응해야만 했다. 신애는 밀양이라는 공동체에 스며들기로 결심한다. 억지웃음, 억지농담을 앞세워 억지로 부대끼며 이웃 주민과 가까워지려 술도 마시고 자신을 잔뜩 부풀려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밀양, 따스한 햇볕 뒤 숨겨진 시선
약국 김 집사는 ‘과부는 당연히 슬프지 않겠느냐’며 당신(신애)같은 사람에게 종교가 꼭 필요하다며, 교회에 나오라고 제안했지만 신애는 그냥 흘려들었다. 누구 맘대로 자신의 고통을 평가하는가? 심지어 스스로 고통스럽다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따사로운 햇볕이 닿는 곳 모두 주님의 눈과 뜻이 깃든다나? 신애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과 종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잠시 세상과 멀어져 소음을 줄이고 싶었고 준이와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다. 신의 존재일랑 느껴본 적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준의 납치 살해 사건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이젠 정말 고통스러웠다. 서울에서 도망쳐 찾아온 밀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밀양에서 적응하려는 노력이었지만 아이를 방치하게 했다는 생각이,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아 아이가 자신을 찾을 때 외면했다는 죄책감이 신애를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무너져가는 자신을 지탱해 줄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붙잡고 싶었다. 그렇게 신애는 교회로 향하게 된다.
신애는 기도회에서 세상이 무너질듯 통곡을 했다. 자신을 아무 말 없이 토닥이는 손길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성경의 한 구절, 목사의 한 마디,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주는 따스함은 신애의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애는 모든 걸 잃고, 자기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며, 두 발 딛고 설 자리 하나 없이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었다. 그런 신애에게 교회는 더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잠시나마 두 발 딛고 설 자리 한편을 내주었다. 종교와 공동체가 제공해준 것은 영혼의 울타리라는 인간 최후의 안전망이었다. 신애는 불안정하고 위태롭지만 교회에서 인격의 틀을 빌릴 수 있었다.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자신은 괜찮다며 새 삶을 얻었다며 간증하는 신애는 종교에 속은 게 아니었다. 그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치유는 아니었지만, 끝없이 추락하며 이를 스스로 멈추고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람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어디에나 비추는 햇빛은 어디에나 주님의 의지가 함께한다는 말과 함께 밀양의 의미는 ‘말 없이 보듬어주는 따뜻한 포옹’과 같은 인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런 비밀의 햇볕은 미지의 존재가 어디서나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느끼게 했다.
밀양, 시선이 소외된 곳에 대한 이야기
신애는 정말 자신이 괜찮아졌다는 믿음을 얻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범인마저 용서할 수 있다면 정말 고통에서 벗어나 새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범인의 면회에서 신애는 자기 귀를 의심할 말을 듣게 된다.
"저 역시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
신애가 딛고 있던 한 줌의 땅과 자신을 지탱하던 영혼의 울타리는 거짓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만 구원의 손길을 뻗어 준 게 아니었다. 범인과 같은 세계, 같은 믿음을 공유한다는 걸 알게 된 신애는 다시 추락하게 되었다. 분명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깊은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이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하게 된다. 신애의 복수의 화살은 이제 범인에서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다. 자신보다 먼저 범인을 용서해버리는 바람에 자신이 용서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하나님을 향한 분노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복수는 어딜 향해야 하는 걸까.
그간 교회를 다니며 배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가르침, 교회의 믿음을 모두 뒤집어버리면 될 일 아닌가. 더는 이웃들을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됨을 모두에게 알리고, 다른 교인을 타락시키고, 자신을 스스로 해치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볼 수 있도록 빛이 닿는 곳에서 행한다. 그렇게 신애는 스스로 존재가치를 상실시키고 있었다.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하나님을 향한 복수의 말로는 그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짓밟고 파괴하는 것이었다. 신애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삶을 느낀다. 절실히 살고 싶다고 외친다.
한 사람의 끝없는 추락 속에서 영혼도 상황도 최악으로 향하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끔찍하고 숨 막히는 경험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이렇게 깊이 관여된 적이 있던가. 눈 돌릴 수 없게 짜인 영화라는 매체는 고통의 모든 과정을 방관하게 만든다. 영화의 긴 러닝타임 마저도 의도된 것으로 느껴질 만큼 영화를 보는 내가 질식할 것만 같았다. 만일 신애가 겪은 이 일을 우리가 접한다면 그건 뉴스나 기사일 것이다. 몇 분, 몇 줄짜리 기사로 사회의 큰 이목을 끌며 공분을 일으켜도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며, 끝까지 사건을 추적하더라도 화면과 지면을 넘어서진 못한다. 아무리 주목받아도 결국엔 외면받는 모습은 마치 비밀의 햇볕과도 같다.
신애와 종찬이 햇볕 가득한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모습을 담던 카메라는 두 주인공에게서 멀어져 마당 한 켠 외진 곳을 비추는 햇볕으로 이동한다. 같은 햇볕 아래에서도 중심과 외진 곳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밀양이란 마치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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