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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사는 게 너무 힘들 때본 것/영화 2025. 1. 11. 21:38
가볍지만 무거운
다중우주, 미시 세계, 정체성, 존재, 자유의지, 운명론, 진리, 선과 악의 정의와 그 모호한 경계… 하나같이 붙잡고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를 무거운 주제들이 쏟아진다. 마치 50,000 피스 퍼즐을 뒤집어엎어 놓은 듯 머릿속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기분이 들었다. 무거워지는 내 머리와 느려지는 연산속도… 이런 내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화는 더 빠른 속도로 다중 우주를 넘나들며 현란한 액션을 펼치는 동시에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때로는 귀엽고 아기자기하게 이끌었다. 무수한 퍼즐 조각을 주우며 따라가기 급급했던 나는 그냥 생각을 정리하며 보기를 포기했고 그러자 좀 더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포장한 이 영화의 언어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나를 영화에 맡긴 채 의식의 흐름대로 보고 있자니 인상적인 감상과 영감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알 게 뭐야‘ 하고 유쾌한 몰입에 빠져들었다. 영화가 길어지며 후반부에 다소 느슨해진 덕분에 다시 이 영화가 무얼 말하고 싶은걸까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영화 마지막, 조각조각 흩어지고 파편화된 메시지들을 ‘가족의 서사’로 연결하고 집중해 준 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이 영화가 풀어 헤쳐놓은 퍼즐 속 여러 그림 중 하나도 맞추지 못한 채 퍼즐 맞추기 자체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이 영화에 담긴 수많은 이야깃거리 중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힘들고 어렵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사실을 인지할 때, 복잡하게 얽힌 가족사라는 실타래를 푸는 첫걸음이 되기도 한다. 삶은 어찌나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정신없이 살다보면 나를 위한 것과 가족을 위한 것을 혼동하기도 한다.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생겨난 혼동이 오해와 왜곡을 만들고 커다란 혼란이 되어 손댈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온전히 풀어낼 수도 그렇다고 없애버릴 수도 없는 거대하게 얽힌 실타래를 애써 무시한 채 산다. 그게 가족의 숙명인 것처럼.
충돌이 필요해
알파 유니버스에서 조이(딸)는 에블린(엄마)을 쫓지만, 그 이유는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해 가며 에블린을 쫓는 조이를 막으려 했는데, 죽이기 위한 게 아니었다고? 그렇다면 대체 왜 그렇게 쫓은 건데? 라는 물음에 조이는 자신이 마주한 진리(베이글)를 같이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이는 자신과 함께할 동료를 원했던 걸까? 근데 왜 하필 그 대상이 에블린이었을까? 나는 조이를 통해 내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학창 시절은 엄마와 투쟁의 역사였다. 그 투쟁 속에서 나는 '엄마와 난 정반대의 사람'으로 정의 내렸다.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이 서로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인정받기를 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면 엄마도 나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과 내 가치관을 설명하고 내가 추구하는 삶을 인정받고자 했었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대화는 늘 우리는 해결하지 못한 채 어물쩍 묻어두었던 과거의 사건으로 돌아가게 만들기 일쑤였다. 너무나도 복잡하게 꼬이고 뒤엉킨 실타래를 두고 네가 옳니, 내가 옳으니, 실랑이를 벌이다 지쳐 포기할 뿐이었다.
늘 실패를 반복했지만 가족이라는 연은 결코 내 의지로 끊어낼 수 없기에, 더 이상 과거가 아닌 현시점에서 서로 마주하고 함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길 바랬다. 살다 보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끝없는 무력감과 고독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그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처음 경험하는 일에는 미숙하기 마련인데, 나는 왜 부모님이 완벽하기를 바라왔던 걸까‘ 나는 늘 존중받기를 원하면서 언제 한 번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한 적이 있었나? 라는 물음에 도달하자, 내가 먼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여러 차례, 오랜 시간에 걸쳐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늘 엄마라는 역할로만 바라보고 제대로 존중하지 않던 사람은 나였다. 엄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미숙하고 연약한 소녀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다가가며 조금이나마 엄마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엄마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절대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뒤엉킨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랜 투쟁으로 인해 서로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은 서서히 회복되어 가는 듯 보인다. 존중하는 마음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절대 닿지 않을 것만 같던 두 세계가 비로소 연결될 수 있었다. 비로소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영화 속 표현처럼 모든 시간 선의 나와 엄마는 화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조이 역시 에블린을 인정받고 싶은 대상으로서 쫓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누구보다 오랫동안 지켜보며 긴밀한 관계였지만, 어긋난 기대와 소통의 부재는 두 사람을 절대 닿을 수 없는 평행선 같은 관계로 만들었다. 이해는 줄어들고 진심은 알아서 알아주길 바라며 불평과 불만만을 드러내니 존중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조이는 누구보다 자신의 세계를 이해시키고 싶은 사람으로 에블린을 찾았다. 격렬하게 싸우고 또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침내 에블린 역시 조이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충돌은 갈등을 낳고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진심을 드러내야 비로소 이해와 존중의 길이 열린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두 행성을 충돌시킴으로써 각자의 세계가 갈등 끝에 맞닿는다는 표현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나는 그 장면보다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장면이 인상 깊게 느껴졌다. 진리의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택하는 조이와 그 선택을 존중하는 에블린, 그리고 자기 딸과 함께 남고 싶기에 다시 손을 뻗는 것을 택하는 에블린과 그 손을 잡는 조이의 모습은 서로의 존재와 선택을 존중하며 진심이 통했음이 나타나는 장면이었다.
충돌 없이는 서로 맞닿을 수 없다. 갈등과 상처가 두려워 계속 피하기만 한다면 절대로 두 세계는 연결될 수 없다.
사는 게 너무 힘들 때
이 영화의 주인공, 최악의 에블린의 삶 눈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무 처리였다. 알파 버스를 살던 최선의 에블린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조부 투바키를 막고 세계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세무 처리에서 세계 평화로 문제의 규모가 커지며 에블린은 변화한다. 혼란스러웠던 최악의 에블린은 점차 거대한 악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몰입하며 그 어떤 에블린도 가질 수 없었던 폭 넓은 관점으로 복잡하게 얽힌 문제와 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늘 최악의 선택을 해왔던 에블린이었기에 조부 투바키와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에도 조부 투바키와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에블린의 문제 접근 방법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듯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멀어지면, 마치 우주에서 지구의 나를 바라보듯 나라는 존재가 너무 작고 나약하게 느껴져 모든 게 부질없고 허무하게 느껴지게 된다. 반면 삶에 너무 몰입하면 당장 눈앞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고통을 느끼고, 이겨내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너무나 삶에 밀접한 관점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강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의 폭풍에 휘말리게 만든다. 그렇게 너무 괴로울 땐 잠시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마치 태산 같아서 뛰어넘을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다고 느꼈던 눈앞의 문제는 뒷동산처럼 보인다. 조금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태산같이 느껴졌던 문제들을 어떻게든 해쳐왔던 나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던 날은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견딜 만했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견디다 보면 어느새 폭풍은 지나고 나는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너무 멀리 바라보다 삶이 허무해지고 무기력해질 때는 다시 내 삶으로 가까이 다가와 작은 일에도 울고 웃으며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지금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를 만들고 그 선택에 따라 나는 달라질 수 있다. 지금 내게 닥친 시련과 역경이 나를 몰아붙여 견디지 못할 것만 같을 때, 이 순간에서 조금 떨어져 나의 삶을 관조하고 삶 전체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다면 고통을 줄이고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다. 마치 최악의 선택을 해왔지만, 최고의 행복을 찾아낸 에블린처럼. 영화의 마지막 에블린의 모습은 더 이상 최악의 선택을 해온 에블린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에블린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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