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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읽은 것/~2024 2020. 7. 6. 05:07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처음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고 보게 되는 존 키츠의 ‘그리고 이 광활한 고요함 속에서 나는 장밋빛 안식처를 입을 것이네! 활동하는 뇌의 격자무늬 화환을 쓰고’라는 글을 몇 번을 되 내어봐도 이 문장을 인용한 저자의 의도가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완독을 마친 후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이 책을 펴고 이 문장을 맞이 했을 때, 난 '저자의 의도를 이렇게 함축적으로 담아낸 문장이 더 있을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광활한 고요함 속이야말로 니콜라스 카가 바라는 진정한 사고의 탄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 존 키츠의 글을 보고 와 닿지 않던 까닭은 나 역시 저자가 말하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저자는 왜 인터넷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걸까.
-뇌는 변한다
“인간의 뇌세포는 사용할수록 말 그대로 더 커지고 발전하며, 사용하지 않으면 줄어들거나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모든 행동은 신경조직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42p)
뇌 가소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완벽한 공부법]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후 많은 자기계발서에 뇌 가소성에 대한 이야기, 또는 비슷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뇌 가소성은 핵심 키워드이다. 뇌는 변한다. 그것도 매우 유연하게. 얼마나 유연한지 뇌는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과거 방식을 바꿔 자신을 새롭게 정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이 만든 도구와 지적 기술에 의해서도 뇌는 변한다. 2010년에 쓰인 책에 등장한 이런 간단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2020년을 사는 인류에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뇌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사실은 이제 놀랍지 않다. 그렇다면 뇌와 기술 사이 관계와 뇌의 변화가 불러오는 사고방식의 변화를 알아보자.
“우리가 도구와 맺는 긴밀한 관계는 쌍방향적이다. 기술이 우리 자아의 확장인 것처럼 우리 역시 기술의 확장이 된다.” (301p)
“지적 기술의 사용이 뇌 회로를 형성하고 재형성할 뿐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다. 반복된 경험은 종류와 관계없이 시냅스에 영향을 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신경 체계를 확장하거나 보조해주는 도구의 반복된 사용으로 인한 변화다.” (80p)
지적 기술은 당시 인간의 사고방식에 큰 충격을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해서 영향을 주고 이후 충격과 조합되거나 해당 기술의 해석 용도로 활용되기도 한다. 일단 나타난 지적 기술은 소멸까지 지속해서 인간 사고에 영향을 준다. 도구는 의지도 목적도 없지만, 인간과 같은 시간 축을 공유하면서 인간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언어와 인간의 사고
인간 만든 수많은 지적 기술 중 가장 많은 영향력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은 단순한 외부적 보조물이 아니라 의식에 대한 내부적 변화인데, 특히 단어에 영향을 줄 때 가장 그렇다.’고 했다. 언어의 역사는 사고의 역사이기도 하다.”(82p)
도구의 사용이 인간의 뇌에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사실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도구로 인해 새로이 탄생하는 단어이다. 도구를 지칭하는 단어와 도구를 사용할때 필요한 단어, 도구로 인해 발생하는 파생 도구와 파생어 또한, 새로이 탄생한 단어들은 그 도구와 유사한 행위를 할때에도 활용한다. 우리는 학습, 활용, 응용의 단계를 거친다. 학습하고 활용하는 것은 하나의 도구/기술의 원리와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응용의 영역은 연결의 단계에 해당한다. 배운 것을 다른 영역에 접목 시키거나 합치는 등 아주 기존의 쓰임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쓰임과 그 의미, 가치를 확장시키는 행위이다. 이는 단순히 도구/기술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전반적인 활동영역에서 나타난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단어가 새로이 만들어지면, 이 단어는 본래의 목적대로 쓰이다가 다른 분야 비슷한 맥락에 사용된다. ‘서핑하다’와 같이 아주 특정한 상황에서만 쓰이는 단어가 웹과 만나 웹서핑이라는 단어로 활용되고 이는 더욱 확장되어 웹을 바다처럼 인식하기까지 한다. 인간의 사고는 매우 유연해서 이미 활발하게 쓰이는 도구/기술/단어와 같은 것들을 다른 영역에 사용하고 그와 연관된 개념들을 덧붙이며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데 매우 익숙한 것 같다. 특히 언어는 인간의 사고에 더욱 긴밀하게 작용하며 그 영향은 매우 직접적인 것으로 보인다. 언어를 전달하는 매체의 역사를 지켜보는 것은 인간 사고의 역사를 보는 것과 같다.
1. 구어
구어 문화의 수호자는 소크라테스로 대변된다.
소크라테스(87~88p)
- 단순한 사람만이 글로 쓰인 것이 지식과 대상에 대한 기록 중 최고라고 생각할 것
- 말하기, 학습자의 영혼에 새겨진 지적인 말
- 망각하는 옛날과 달리 기억할 수 있다, 글로써 자기 생각을 잡아내는 데 다른 실용적인 이익을 인정하지만, 알파벳이라는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를 부정적으로 바꿀 것이다.
- 외부 기호가 내부 기억력을 대체하면서 글쓰기는 우리의 피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만들며,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지혜로 향할 수 있는 지적을 한 깊이를 획득하는 데 방해가 될 것
문자 이전의 시대에는 말하기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상투어와 기억을 위한 기능성 외에도 깊은 문학적 특성을 보인 말하기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짧은 말로 사람들에게 깊은 통찰을 주는 속담과 격언들은 아직도 구전되고 있다. 지금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 잠재해 있는 많은 속담과 격언들 그리고 문자 등장 이후 문학을 주도했던 ‘시’가 구어 문화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대의 말하기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뿐만 아니라 문학성을 겸비한 고도로 발달한 말하기 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등장에 우려를 표한 게 아닐까.2. 문자 - 스크립투라 콘티누아
의사소통하고 사회적 기능은 여전히 말하기가 담당하고 있었지만, 기억을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교육과 성장의 도구가 되어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하지만 쓰고 읽는 형태가 온전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스크립투라 콘티누아는 단순히 글의 해석을 방해하는 걸림돌을 넘어 작가들에게는 시련이었다.” (102p)
단어 사이 띄어쓰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 시기는 낭독이 필수였다. 이는 아직 구워 문화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여전히 ‘시’가 문학의 중심이었지만 문자는 계속해서 기억과 암송을 위한 율동적이고 형식적인 구조에서 언어를 해방했다. 문자의 등장은 말하기의 깊이를 감소시켰을지 몰라도 문학 소비 시장을 증가시켰다. 더 많이 즐기고 더 많은 탐구자가 등장하고 더 많은 생산을 촉진했다.
글쓰기는 스크립투라 콘티누아에서 점차 벗어나 띄어쓰기와 문법과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단어 순서에 관한 기준의 등장은 언어 구조에 혁명을 가져왔고 이는 읽기에 혁신적인 발달을 가져왔다. 읽기에 수월해지자 뇌는 남는 힘을 의미 해석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깊이 읽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깊이 읽는 행위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자연 상태의 뇌는 산만하다. 현존하는 인류는 수렵채집 시대와 유전적 변화는 매우 적은 상태이다. 몰입하는 행위는 생존에 매우 불리한 능력이었다. 언제나 주위를 살피며, 맹수의 위협이나 천재지변과 같이 주변 환경이 변화할 때 우리에게 위험 또는 기회가 될 수 있으므로 잘 감지해야 했다. 그리고 그 작용으로 인간은 변화에 매우 잘 대응하도록 설계되었다. 인간이 무언가에 몰입하며,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한 가지에 몰두하는 능력은 글을 쓰고 읽는데 발달하게 되었고 이는 언어의 깊이 추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의 독창성과 표현의 창의성은 모범적 형태의 사고였다. 웅변가 소크라테스와 작가 플라톤 간의 다툼은 결국 플라톤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승리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104p)
글을 쓰고 읽는 행위의 중요성은 점점 증가했지만, 여전히 소수의 엘리트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문학 소비 시장이 커질수록 매체의 변화에 대한 욕구는 점점 커졌고 이는 인쇄술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3. 문자 - 구텐베르크 인쇄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해 1445년 무렵 책과 다른 문서의 생산을 자동화할 기회를 발견했다.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책을 구하기가 이전보다 쉬워지면서 이는 글을 읽고 쓰고자 하는 대중들의 욕망에 불을 지폈고 책에 대한 수요를 더욱 자극했다.” (108p)
“깊이 읽기는 ‘결코 피동적인 행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곧 독자가 책이 되는 것이다.” (113p)
문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우려는 기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자와 인쇄술이 만든 선순환은 문학의 대중화를 끌어냈고 깊이 읽기를 가능하게 했으며, 깊이 읽기는 책과 책을 읽는 사람이 하나 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저자가 서술한 것만큼 완벽한 것은 없는 듯하다. ‘작가와 독자의 결합은 언제나 긴밀한 공생관계에 있는데, 이는 상호 간 지적, 예술적 비료를 주는 행위다. 작가의 말은 독자의 사고에 촉매제로 작용해 새로운 시각, 연상, 인식과 때로는 깨달음의 순간을 불러온다. 또한, 집중적이고 비판적인 독자의 존재는 작가의 작품에 자극을 제공한다.’ (114p) 문학성은 깊이 읽기의 등장과 출판 시장의 확대, 문학 소비량의 증가와 더불어 최고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인쇄술의 발달과 책의 등장은 정보의 범람을 일으켰다. 우리 주위에 책이 마를 일이 없었고 읽어도 읽어도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지식의 샘은 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같은 자리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샘물로 묵을 축일 나그네를 기다릴 뿐이었다. 나그네가 샘을 마주하고 마시는 것은 오로지 나그네의 몫이었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고요하게 치러질 수 있었고 샘물을 깊이 음미할 수 있었다. 정보의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맞이한 나그네들은 주도권을 잃었다. 정보의 바다는 같은 자리에서 파도치며 백사장을 만들어주는 자연적 바다가 아니었다. 이 정보의 바다는 사실 정보의 대기였다. 정보는 쉴 틈 없이 들어왔다 나갔으며, 이는 마치 호흡과 같아서 정보를 맞이하고 마실 수 있는 권리는 나그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하는 사람을 보며 조급함을 느끼게 만들 정도였으니, 깊이는 사라지고 빠르게 훑어보는 습관이 생겼다.4. 디지털 - 인터넷
오늘날에 이르러 문자의 기능성은 더욱 확대되었다. 거의 모든 기억은 자료화 되어 인터넷과 전자 기기에 저장되고 이에 의존하고 있다. 의사소통하는 사회적인 면에서도 쓰기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말보다 문자가 편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직접 대면하고 말하는 것보다 전화를, 전화보다 문자 메시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자 메시지는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정말 말보다 빠르고 긴밀하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언어의 문학성의 측면으로 봤을 때는 어떨까. 문자가 등장하고 깊이 읽기를 통해 문학적 깊이를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인터넷 시대엔 그 문학적 깊이가 깊어졌을까? 인터넷 시대에 이르러 책을 대체할 수단으로 유력한 ‘전자책’과의 비교를 통해 알아보자.이는 전자책이라서 보이는 차이가 아니다. 인터넷과 전자 기기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인해 발현된 차이다. 또한, 전자책은 그 어떤 전자 매체 보다 읽고 쓰는데 최적화되어있다. 인터넷이 가진 쌍방향상, 하이퍼링크 연결, 검색 가능성, 멀티미디어라는 편리한 기술의 혜택은 방해 기술 생태계를 구축했다. 인터넷은 집중력 저하와 얕은 읽기 형태인 ‘훑어보기’를 확산시켰다. 또한, 개별 판매라는 개인의 선택권을 확대한 대신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빠르고 편리하게 선택하기 위해 만들어진 추천 알고리즘에 의해 편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림1]에서 나타난 문학성의 공백은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 나타난 ‘훑어보기’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톨스토이와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을 공허하게 칭찬하고 있었다. 우리의 오랜 문학적 습관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환경에서 생활하는 데 따른 부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셜키는 이제 인터넷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풍부한 접근성 덕분에 마침내 이 피곤한 습관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168)
구어 문화에서 문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문학성의 정수는 ‘시’였다. 모든 문학은 시로 통했고 시를 낭송했다. 오늘날 시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시를 구어 문화 시대의 사람들만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문자의 시대에서 데이터 중심의 디지털 시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문학성의 정수는 책이다. 책은 깊이 읽기를 통해 고요한 집중의 세계를 선물했고 저자와 독자 간 친밀하고도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책을 읽고, 깊이 읽기의 가치는 구어 문화의 ‘시’처럼 아주 극소수만 계승할 뿐 대부분이 그 가치를 잊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이미 톨스토이와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을 공허하게 칭찬하고 있다는 저자의 말이 이 책에서 다뤄온 언어의 변천사와 함께 언어의 방향성과 미래를 살짝 들춰 보이는 것 같다.
-두 가지 호기심
인간의 뇌는 변화한다. 그 변화는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 특히 지적 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통해 현존하는 읽기 매체인 디지털을 대표하는 전자책과 아날로그를 대표하는 책을 통해 매체가 인간의 뇌와 사고방식에 주는 영향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문명의 혜택과 깊은 사색이 주는 무의식 탐구 사이, 어떤 자세로 어떻게 각 관점의 단점을 피하고 장점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는 개인의 판단과 선택에 달렸다. 이런 핵심 주제와 별개로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두 가지 궁금증과 상상이 있다.
1. 문자 이전의 시대
깊이 읽기의 가치를 이해할수록 소크라테스의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로 인해 외부세계에 기억을 의존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구어 문화가 가진 문학성을 문자와 글쓰기 문화가 해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우려는 깊이 읽기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높이 평가했던 구어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났다. 어쩌면, 구어 시대 사람들은 현시대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무의식 세계를 탐구하는 모험가들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 깊이에 다다른 사람들은 교육환경의 차이나 지식을 탐구하는 가치에 대한 상대성으로 인해 그 수는 극소수였겠지만, 사고방식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깊이를 절대량을 따질 수 있다면 헤아릴 수조차 없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상상을 하고 있자면, 소설과 드라마, 신화나 전설에서 등장하는 신과 종교적인 일화들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흥분마저 느껴진다.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된 배경은 ‘기억’과 ‘완결성’이라는 가치에서 출발한다.
“그(에라스뮈스)에게 암기란 단순한 저장의 의미 이상이었다. 종합의 과정을 위한 첫 번째 단계였고, 독서에 대한 더 깊고 개인적인 이해로 이끄는 과정이다.” (262p)
기억이 갖는 의미는 상상 그 이상이다. 기억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던 구어 시대 사람들은 소수만이 학습과 진리 탐구를 실행할 수 있었지만, 대신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깊이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먼 조상들의 구어 세계는 오늘날의 우리가 더는 알 수 없는 감정적, 직관적 깊이를 지녔을 것이다. 구어 문화가 쇠퇴한 지금은 절대 느낄 수 없는 그 시대 사람들만의 감각, 감정, 감상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손으로 글 쓸 때와 타자 칠 때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위화감과 생소함, 어색함. 사용하는 언어의 형태도 변화한다. 사고하는 방식은 오죽할까. 문자 사용 이전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 특히 강렬한 감각적인 몰입을 누렸을 것이라 맥루한은 말한다. 우리 조상들의 구어 문화는 지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 면에서 오늘날보다 더 의식적이었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네. (중략) 인터넷이 축소하고 있는 것은 존슨이 말한 첫 번째 종류의 지식이다. 우리 스스로 깊이 아는 능력, 우리의 사고 안에서 독창적인 지식이 피어오르게 하는, 풍부하고 색다른 일련의 연관 관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바로 그 능력 말이다.” (213p)
인터넷이 불러올 상실에 대한 우려가 소크라테스의 문자에 대한 우려와 같지 않은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안다’라는 관점에서 오늘날엔 양적으로 더 많이 알긴 몰라도 기억을 외부수단에 의존하지 않았던 구어 시대가 질적으로는 더 깊이 있지 않았을까.
“완벽을 기하려는 압박은, 이 압박이 가한 예술적 혹독함과 함께 줄어들 것이다.” (162p)
완결성. 인쇄된 책은 완성본이다. 일단 인쇄가 되어 종이에 잉크가 새겨지게 되면 그 글은 지워질 수 없다. 이러한 완결성은 작가와 편집자들에게 완벽을 기하도록 압박을 주었다. 이 압박감은 완벽에 대한 강한 열망을 자극하여 예술성과 문학성을 향상하는 촉매가 되었다. 이에 반해 전자책은 영구적이지 못하며, 진행 중인 과정의 일부로 느껴진다. 출판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수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작품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도 변화시킬 우려가 있다. 과거 편지와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비교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무형식과 즉각 성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표현력과 수사법을 잃었다. (163p) 이러한 글쓰기의 변화만 지켜봐도 깊이의 차이가 확연하다. 완결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글쓰기가 말하기에 비교 가능할까. 말하기는 시작과 동시에 종결에 이른다. 상투어로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 대중이 아닌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 사이의 깊이 있는 대화는 어땠을까. 단어 하나, 단어와 단어를 잇는 단어 또는 공백, 화법과 어투에 따라 그 언어의 전달이 다르게 달라지고 이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지 않으면 그 의도는 왜곡되거나 닿지 않게 마련이다. 그들은 얼마나 완벽을 기해 말했을까. 지금까지도 구전되는 속담과 격언들엔 짧지만 깊은 통찰이 있으므로 여전히 회자하는 것이 아닌가. 구어 시대에 소비되어 증발해버린 수많은 문장은 얼마나 문학적이고 깊이를 가졌을까.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구어 문화가 문학적으로 더 깊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그저 나의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저자는 ‘우리 조상들의 구어 문화는 지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 면에서 오늘날보다 더 피상적이었다. 맥루한은 이에 대해, 서구 사회의 성과물을 확실한데, 이는 글을 읽고 쓰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증거라고 썼다.’라고 책에서 언급한다. 일단 지식의 양과 질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책이라는 매체의 등장과 그 이후 문학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규모의 차이와 그사이 발생하는 상호작용이 만드는 창발을 생각해보면 나의 추측은 단지 망상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신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의 존재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들이 이러한 배경에서 그 시대에만 존재했던 게 아닐까’라고 나의 상상이 만든 독서의 즐거움을 지켜주고 싶다.
2. 문학성의 공백과 대체재의 등장 가능성
“교사나 학생 모두 책의 선형적이고 계층적인 세계를 떠나 인터넷의 어디서나 가능한 연결성과 구석구석 스며든 접근성의 세계에 진입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했다.” (168p)
현대 사회는 복잡계로, 비선형적이고 불확실성의 세계이다. 저자가 말했듯 책은 선형적이다. 그리고 전자책은 비선형적 기술의 산물이다. 인류와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이 복잡계의 세계라면 그들이 사는 사회의 주된 매체는 비선형적인 매체가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책의 미래는 복잡계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그 모습이 현재 전자책은 아닐 수 있지만, 기술의 발전과 시간이 갖는 방향성에 따르게 되지 않을까.
인터넷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매체의 발달 과정에서 인터넷이 등장하고 디지털 기기가 가진 특성으로 인해 언어의 문학성에 공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에 구어 시대에서 문자로 그 중심이 이동할 때 소크라테스의 우려가 있었지만, 읽고 쓰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그 틈은 점점 좁혀지고 깊이 읽기가 등장하며 그 깊이는 더 깊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현재 문자에서 디지털로 매체의 중심이 이동하는 초기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부작용으로 볼 수 없을까. 정말 문학적 깊이는 상실되어가고 있고 그 추세는 막을 수 없는 걸까. 어느 시점에서 깊이 읽기가 등장한 것처럼 깊이 읽기보다 더 탁월한 무언가가 등장할 수는 없을까.
“책은 신문을 극복했듯 축음기를 극복해냈다. 듣기는 읽기를 대체하지 못했다.” (166p)
듣기는 읽기를 대체하지 못했지만, ‘보기’는 어떨까. 현재 사람들이 미디어를 소비하는 가장 주된 형태는 ‘보기’이다. 보기는 듣기와 읽기의 혼합된 형태로 문학성을 지닌 영화와 예술이라는 영역과 교육과 학습을 담당하는 영역까지 그 영향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가고 있다. 아직 보는 행위가 읽는 행위만큼 능동적이고 깊이감을 갖추지 못했지만 새로운 미디어 소비 형태로 중심을 가져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 읽기가 깊이 읽기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현재는 보기의 진화된 형태가 나타나기까지의 과도기가 아닐까.
“오디오와 비디 오적 설명이나 지시를 결합한, 세심하게 준비된 발표는 학생들의 학습력을 향상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196p)
멀티미디어는 상호보완 설계를 잘하면 효과적이다. 메시지를 단순하게 전달하되, 오디오와 비디 오적 설명이 부수적으로 결합하였을 때 학습력이 향상된다. 멀티미디어 기술과 매체는 계속해서 진보하고 발전하고 있다. 학습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은 전달력이 높다는 뜻으로 깊이 있는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진 않을까. 책이라는 완벽한 발명을 대체하기엔 턱없이 부족함이 느껴지지만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책이 과연 다른 미디어로 대체될 것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책은 좀 더 갈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디지털화 속에서 소실된 능력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독서 인구는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지만, 전체로 따지면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극히 주관적 의견. 코로나의 여파로 출판시장의 파이가 커졌다는 통계를 보긴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소실된 능력에 대한 갈증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책의 깊이 읽기가 주는 혜택을 대체할 수 있는 미디어의 등장할 때까지, 출판시장이 유지될 수 없을 만큼 책 읽기의 가치를 잊을 때까지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며,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책이었다. 의문과 의구심, 호기심과 깨달음,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스스로 많은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아니지만 좀 더 구체화한 물음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아직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판단은 유보하고 싶다. 인간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각자가 수집한 정보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결합한 판단을 한다. 각자의 논리가 있고 맥락이 반영되어 있으며,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며 결단을 내리기엔 아직 모든 것은 미지수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내 방향성과 나의 가치 실현에 맞는 판단을 할 뿐이다. 내가 가진 이 메시지들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이 나를 좀 더 성장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의문들이 내가 당연시하고 때론 맹목적으로 맹신하는 것들에 대한 객관성을 찾도록 도와준다. 특히나 인터넷이라는 기술이 내게 미친 영향들과 올바른 사용 방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인터넷, 디지털 시대의 사고방법보다 문자, 책 기반의 사고 방법을 선호하는 저자이지만, 양 측의 주장과 다양한 관점을 수렴해 저자만의 관점을 도출해 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효율적 사고와 사색적 사고 사이에서 사색적 사고에 압도적인 비중을 두고 있기에, 더 자료를 찾고 탐구해봐야 한다. 이 책에 인용된 데이터들이 현재에 이르러 어떻게 변화했나를 조사하고 공부해봐야 좀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유용한 이 기술을 이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인터넷이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효율적 정보 수집과 비효율적 사색이 갖는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없을까. 아직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노력을 좀 더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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