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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역사로 다시 확인하는 성장의 단서
    읽은 것/인문 2020. 7. 27. 00:08

     친구가 자신이 활동하는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여줬다. ‘양 측의 의견이 아주 팽팽한데, 네 의견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신이 자주 가던 고깃집이 있는데, 그곳을 가면 항상 고기를 다 먹고 난 후 고기 먹은 불판에 공깃밥을 시켜 볶음밥을 직접 만들어 먹어 왔다고 한다. 사건이 터진 날은 고깃집 사장님이 가게에서 볶음밥 서비스를 제공하니, 공깃밥으로 볶음밥을 먹지 말아 달라고 말했단다. 늘 그렇게 볶음밥을 해먹었는데 이제 와서 안된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데, 내 돈 주고 내가 산 공깃밥으로 볶음밥을 직접 만들어 먹겠다는데 왜 뭐라고 하느냐는 글이었다. 이 글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갑론을박 할 일일까?’였다.
     식당 측의 주장은 ‘엄연히 메뉴가 있는데, 손님이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은 옳지 않다. 손님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는 모두 일관되게 제공되고 있는데, 누군가는 직접 만들어 먹고 누구는 사 먹는 것은 손님 사이 혼선을 유발할 수 있다. 그 혼선에는 비슷한 상품(혹은 서비스)이지만 가격의 차이 발생과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손님이 생겨나는 어려움, 그 사이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식당의 운영 측면에서 어려움 등이 있다. 그러므로 일괄적으로 스스로 볶음밥은 불가하다.’이고 손님의 주장은 ‘공깃밥을 식당에서 판매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돈 역시 지급했다. 그렇게 구매한 밥을 볶음밥을 해먹든 주먹밥을 해먹든 그것은 손님의 자유 아닌가. 공깃밥을 사서 볶음밥을 만들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구매한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먹겠다는데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인가.’이다. 구매한 상품에 대한 자율권을 주장하는 손님과 식당 운영의 일관성을 주장하는 주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양 측의 주장은 명확하며 그 틈을 좁히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커뮤니티 역시 이 사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싸울 일도 아니다. 손님은 자율성을 보장받는 식당을 찾아가면 되고 식당은 일관성을 존중해주는 손님을 받으면 된다. 이게 무슨 당연한 소리냐고?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답을 놓고 어째서 자신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느냐며 하소연하느니 자신이 직접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사람과 거래하라는 뜻이다. 양 측이 타협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이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타협에 방점을 둔 대화를 하는 것이 전제되지 않는데, 왜 얻을 수 없는 답을 강요하며 싸우고 혐오라는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일상 속에 이와 비슷한 일화는 너무도 많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얼음 컵을 받아서 아메리카노를 직접 만들어 먹는 사람, 손님이 있는데 마감 청소를 시작한다고 재방문하지 않겠다는 사람, 술집 신분증 검사를 하는데 놓고 왔다며 신분증 찍은 사진으로는 안되냐는 사람 등 가게와 손님을 넘어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비슷한 문제는 넘쳐난다. 사소하고 작은 의견 차이 같지만 어째서 두 의견간 틈은 멀고 타협의 길은 험난해 보이는 걸까. 왜 자신의 주장을 그렇게도 또렷하고 명확한데, 상대의 주장은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것만 같은 걸까.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경험했고 그 안에서 각자 다른 서사 속에 살아왔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의 이야기 속에선 상대의 주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나름의 이유로 결정된 최선의 행동을 한다. 그런 내 최선의 행동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상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면, 이 작지만 어려운 사건을 해결할 새로운 관점이 보일지도 모른다. 나와 다르다며 네가 틀렸음을 주장하기보다 모두를 만족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고 웃으며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걸까?


    타자의 타자성.

    “하지만 언어가 우리에게 부여한 굉장한 능력은 늘 문제를 일으켰다. 우리를 한데 모은 세계 모형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들어맞아야 했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완강한 타자성이었다.” (39p)
     우리는 물질세계와 타인에 보조를 맞추며 살고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존재를 나로부터 찾기보다 타자와 분리함으로써 구분 짓는다. 이런 기질이 나와는 다른 생각과 관념을 만났을 때, 거부감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국가적, 세대로 형성된 관념들은 개인의 무의식 심층부에 자리 잡는다. 더 좁게는 가정적, 주변 환경적, 관계적으로 형성된 관념들도 존재한다.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관념과 한 인간이 탄생하면서 접촉하며 경험적으로 쌓인 관념들이 개인의 무의식 세계를 형성한다. 여러 관념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면 관념을 수용하기보다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건 없는 수용이 기존의 세계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물음과 답을 하며 스스로 구체화해 나간다. 이런 구체화 과정에 사용되는 주된 수단이 바로 타자성이다.

     

    “타자의 타자성에 의해 형성된 정체성은, 내부에 있을지 모르는 타자의 흔적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응집력을 강화하기 마련이다.” (296p)
     동쪽의 이질적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유럽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 십자군 운동이 그러했고 19세기 무슬림이 기계 문화로 인한 정체성 혼란을 서구적 사회와 성적 습속을 거부해, 무슬림의 정체성을 회복하려 했다. 또한, 인종을 구별 지으며 유럽 중심 백인 사회와 제국주의를 합리화했던 것도 그러하다. 이러한 역사적인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타자성을 이용해 자신의 세계를 구체화함과 동시에 보호할 수 있다. 한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합리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그렇게 편향적으로 만든 세계에 자신을 가두는 행위이다.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앞서 예를 든 3가지의 결과를 잘 알고 있다. 십자군 운동은 유럽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유럽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교도를 죽이고 삶의 터전을 빼앗고 몰아냈다. 그렇게 얻게 된 유럽인이라는 공동체 의식은 이후 제국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서구적 사회와 성적 습속을 거부한 무슬림은 여성의 삶을 옥죄고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강화하는 데 열중하게 된다. 이슬람 세계는 이렇게 회복한 정체성으로 냉전 이후 이슬람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계속해오고 있다. 인종 차별주의는 두말할 여지 없이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오는 쟁점이다. 인종 구별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 주류로 퍼지고 그 실체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인종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체성은 외부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구분 짓고, 자신의 세계에 외부의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손쉽게 구체화 시킬 수 있다. 하지만 논리와 이성에 의해 손쉽게 무너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이성과 불합리로 무장해 감성으로 호소한다.

     

     

    타협점 찾기

     타자성으로 형성된 정체성이든, 자신의 힘으로 만든 정체성이든 우리가 사는 진보의 서사에서는 굳어지고 고정된 관념은 엔트로피에 의해 질서를 잃고 흩어지기 마련이다. 잘못 형성된 가치관도 잘 형성되어 성공을 경험한 가치관도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이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이다.

     

    “큰 그림은 우리 마음속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면 그 그림은 진짜처럼 느껴진다. 사실상 그것은 진짜다.” (524p)
     저자는 세계 공동체 건설이라는 전 인류적 과제를 제시한다. 세계적 서사는 형성 가능할까? 전 세계인이 공유하는 큰 그림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서로 다른 의미의 세계 통합을 끌어내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저자는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 공동체 건설 꿈의 가능성을 말한다.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 분야의 포괄적 이론이라는 과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언어지만 역사적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 패러다임 전환은 어떻게 일어날까. 우리가 인식하고 따르는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우리는 진보의 서사를 따르고 있으므로 새로운 정보는 계속해서 등장하며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새로 등장한 정보는 기존 관념(패러다임)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부정하거나 억압당한다. 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새로 등장하는 정보들은 잠재하게 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존 관념들 사이 새로운 정보의 존재는 기존 관념의 결속을 약화하고 혼란을 증가시킨다. 혼란이 증가하면, 사람들 사이 일관성을 지닌 지배 서사의 필요성이 증가한다. 기존 관념은 점차 흩어지고 점만 남은 채, 새로운 정보들과 연결고리가 생기며 삶과 결속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새로운 관념이 등장하며 기존 관념만큼은 아니어도 점점 지지를 얻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관념이 기존 관념보다 지지를 얻게 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이뤄진다. 구성원들은 이런 패러다임 전환을 갑작스럽게 느끼지만, 사실은 새로운 관념은 점진적으로 주류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 소수만이 패러다임 전환 관정을 체감할 뿐이다. 패러다임 전환 과정을 단순화하면, 1) 기존 패러다임 존재, 2) 새로운 패러다임의 의미심장한 조각 확산, 3) 기존 패러다임의 모순적 상황 심화, 4) 새로운 조각과 기존의 조각 사이 새로운 연결고리 형성, 5) 새로운 패러다임 등장과 지지하는 세력 증가, 6) 패러다임 전환 이라는 대략 여섯 단계를 거쳐 전환이 일어난다. 이렇게 현재 지배적이고 영원할 것 같은 관념들은 결코 영원한 적이 없었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현재 존재하는 불변의 권위와 지배적인 관념들이 무너진다는 사실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주체가 우리라는 사실이 세계 공동체라는 원대한 꿈이 실현 가능하다는 증거이다. 물론 그 과정이 무척이나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꿈이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만큼 시도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지도로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모든 논의가 타당성을 띨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모든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535p)
     세계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진리를 제시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저자가 말하듯 모든 논의가 타당성을 띌 수 있는 대화가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각자의 길을 존중하고 건전한 대화가 가능할 때 우리는 타협점을 도출해낼 수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개인의 서사에도 필요한 교훈이다. 세상엔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건전하게 형성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방면에, 타자의 타자성에 의해 형성된 편향적이고 광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이 믿고 따를 단 하나의 진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맥락에 따라, 타자성이 아닌 자신과 학습과 경험 때문에 형성된 정체성에 따라, 유일무이한 개인의 소망에 따라, 단 하나뿐인 자신에게 최적화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다시 맨 처음의 일화로 돌아오면, 볶음밥을 해먹어도 된다, 혹은 해먹으면 안 된다 라고 답을 보편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식당에서는 가능하더라도 어떤 식당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따지며 잘잘못을 따질 일도 아닐뿐더러 여기서 얻은 답을 보편화시켜 다른 식당에서 볶음밥을 해먹는 것도 웃기다. 나와 이야기를 하는 상대가 나와는 다른 서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타협점을 끌어낼 가능성은 커진다. 모두가 만족할 단 하나의 답을 도출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선 대화가 가능한 상황을 만들자. 대화하며 생기는 수많은 오해와 생각 차이들. 똑같은 단어에도 다르게 다가오는 생각과 감정이 이 괴리를 더 깊게 만든다. 타자성을 알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타협을 전제로 한 대화를 한다. 타협은 단 하나의 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각자가 원하는 방향을 알고 모두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답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답이 단 하나가 아니라 각자 다른 답이어도 좋다. 설령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감정만 격앙된 채 `아 됐어! 그만해!`라고 말하며 갈라선 것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더라도, 서로의 서사를 이해하고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얻은 결과를 얻은 것과 상황과 맥락과 상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불쾌한 감정만 남아 내리는 결정과는 매우 다르다. 요점은 우리가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데 단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과 각자의 서사와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평화롭고 생산적인 의사결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큰 그림이라는 전 인류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거대 서사를 만드는 게 가능한 것처럼 개인과 개인 사이 합의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나와 당신 사이 타협도 끌어내지 못하는데, 전 인류가 공감할 거대 서사를, 같은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를 서사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며, 세계를 하나로 묶을 세계 공동체 건설이라는 크고 원대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목표는 개인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작은 규모로 축소 가능하고 목표로 삼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인해 개인들의 목소리가 커진 현대인들은 자신의 서사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폐쇄성을 지녔던 거대 서사들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도태되고 고통받았다. 개인의 서사라고 다를까? 개인의 서사와 서사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충돌이 만든 파편들은 성장의 기회로 작용함을 이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충돌을 대하는 태도를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갖추면, 과거 유럽이 진보의 서사를 통해 성장을 이뤘듯 개인의 삶에도 눈부신 성장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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