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크 심리학] 감정의 변화와 그 의미읽은 것/인문 2020. 9. 18. 23:26
접하며,
최근 일련의 독서들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형성되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고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심리학과 종교]를 통해 전통적 도그마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깨닫고 어떻게 영혼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무의식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나름의 가치를 형성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생각을 더욱 강화해주고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기술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심지어 지배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일으킨 전통적 도그마의 상실이 만든 혼란과 이 혼란 속에서 나타나는 현대인들의 취약성을 볼 수 있었다. 기술은 경이롭고 놀랄 만큼 인간의 삶을 편안하고 편리하게 만들었으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그 여파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기술과 현대 사회에 정서적 안정감을 공존하게 만들 수 있을까. 적어도 내 삶에서 기술에 지배당하지 않고 적절히 이용할 길은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는 인간 역사를 맥락적으로 바라보며,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엿볼 수 있었다. 역사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기술의 발전과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을까 생각을 했고, 이 커다란 흐름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류는 자기 파괴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걸까.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 [초집중]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를 보며 얻은 고민에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답을 제시한 책이었다. 기술에 다소 회의적인 감정과 인식을 갖게 되었지만, [초집중]을 통해 좀 더 희망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러한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하나의 큰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어준 것이 [테크 심리학]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감정의 의미와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감정들은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맥락에 맞게 각자의 의미를 찾아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감정들의 의미 변화 속에서 일정한 방향성이 느껴졌다. 어떤 만고불변 진리에 도달했다는 의미의 종지부가 아니라, 내 개인적 차원에서 이 이야기를 정리하고 여러 모순되고 상충하는 관점들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 맞는 가치관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이 생각은 여기서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접하는 관련 지식과 통찰들을 통해 수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견고히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종교, 과학, 기술, 심리학에 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숙한 독서가로서 최근 일련의 독서 속에서 느낀 하나의 흐름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느낀 감정의 변화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감정은 고정되어 있는가
"우리의 감정이 날 때부터 타고난 것도 아니고, 피하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실제로 바뀌어왔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518p)
감정에 대한 인식과 정의가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20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변화한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근본적으로, 또 표면적으로 많은 의미와 인식이 변화했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모른다면 전혀 짐작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기 전의 내 생각이 그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지는 이 감정이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 했다. 감정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성격으로 그 가치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사람마다 감정을 느끼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개인이라는 차원에서의 차이가 아닌 사회적, 시대적으로 그 의미와 성격이 이렇게 다르게 변화했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테크 심리학]을 통해 추적한 6가지 감정인 허영심, 외로움, 지루함, 주의 집중, 경외심, 분노 등 다양한 감정들이 종교적 의미로부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적 정의가 당시 인류에게 감정을 인식하는 보편적인 근거가 된다. 하지만 신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 사회가 형성되면서, 감정에 대한 인식과 정의가 변하게 되었다. 6가지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면 이 흐름은 아주 명확하게 다가온다. 허영심을 경계하던 종교사회에서 자아도취라는 긍정적 의미로 변화가 이뤄졌다고 보이지만, SNS 속에서 본질을 잃은 채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고갈되어가고 있는 수많은 개인을 볼 수 있다. 외로움은 종교와 지역사회를 통해 개인이 스스로 통제하고 해소해왔지만, 현대 사회의 외로움은 고독으로, 질병으로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지루함은 존재하지 않던 감정이었고 가장 유사한 의미인 나태와 게으름이라는 종교적 규제를 통해 경계하였으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을 나태와 게으름이 아닌 지루함에 빠뜨렸다. 덕분에 오락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실상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주의 집중은 어떤가. 사람의 지위가 배경이나 종교적 독실성으로 결정되던 시기에서 성과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개인의 뛰어난 지능으로 이동했다. 주의력이 중요해진 사회 속 사람들은 고도 집중과 과잉 집중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다. 경외감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그 의미가 대폭 축소되었다. 경외감에서 두려움과 충격적 감정의 폭풍이 빠지자, 그저 놀라운 순간이 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경외감을 그리워하고 회복하려 하지만, 전통적 도그마의 상실은 온전한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분노는 한계를 인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은 신의 영역이었고 분노는 종교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인간의 한계는 없으며,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분노의 의미는 변화했다. 신에서 엘리트 계층으로, 엘리트 계층에서 특정 인종과 성별로 점점 분노가 허용되는 범위는 넓어졌지만, 한계라는 본질은 특정 계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신의 자리를 인간이 대신하게 된 현대 사회는 분노가 만연해졌다.
"자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스스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생각을 낳았지만, 동시에 실망감도 초래했다." (26p)
자아에 대한 새로운 개념, 즉 인간 중심적 사고는 스스로 힘을 갖게 했고 무한한 가능성을 믿게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에 충족하지 못할 때, 실망도 뒤따랐다. 인류는 그 실망을 극복하고 또다시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하며, 과학과 기술의 진보의 서사를 써오고 있다. 이 과정의 반복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확장된 자아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에 반해 신에 대한 믿음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의 방향이 변화하자, 감정의 의미도 변화하게 되었다.
신념체계의 변화
"막스 베버가 ‘신비롭고도 막대한 힘이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사람은 원칙적으로 계산을 통해 모든 일을 터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환상은 이제 깨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미술적인 수단에 의지하여 영적 존재에 호소하지 않아도 된다. 신비로운 힘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과거 야만인들이야 그렇게 했지만 말이다. 현대인들에게는 기술적 수단과 수학적 계산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고 말했다." (381p)
감정은 분명히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공통으로 나타난 방향성은 신 중심 사고방식에서 인간 중심 사고방식으로 변화였다. 종교의 개념은 종교가 인간 무의식의 원형에서 비롯되었으며, 칼 융은 종교적 체험에서 인간 내면에 작용하는 순수하고 경험적인 입장이라는 본질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즉, 종교란 특정 교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프로테스탄트, 불교 등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리가 종교의 의미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들 안에서도 공통으로 발견되는 가치와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인간 무의식의 원형에서 비롯된 순수하고 경험적인 종교적 체험을 의미한다. 특정 교리가 종교라는 단어를 대표하게 되는 한계를 벗어나게 되자, 전통적인 종교의 개념이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그동안 전통적인 종교가 갖는 강한 도그마와 의례들이 인류의 무의식을 지켜왔다. 하지만 종교는 다양한 교리로 갈라지고, 특정 교리 안에서도 끝없이 분화되어가고 있다. 전통적 종교가 만드는 결속은 계속해서 느슨해지고 그 결속을 약화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단연 ‘과학과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종교는 신을 중심으로 이뤄진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이뤄져 있다. 살면서 맞이하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미스테리한 현상들과 존재들을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과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들, 우주의 신비와 생로병사와 같은 우리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 원리나 배경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의 이름 아래 설명해왔다. 감정 역시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의 영향을 받아 의미가 형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 사회부터 인간의 무의식 안에 존재하는 비인격적이고 비이성적인 힘에 대한 공포를 경계해왔고, 칼 융은 이런 공포를 <영혼의 위험>이라 불렀다. 무의식 세계의 위협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신경증과 공상의 형태로 나타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집단 무의식에 지배당해 광기와 야수성에 의해 비윤리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전통적인 종교는 인간의 무의식에 수세기에 걸쳐 튼튼한 울타리를 형성해 개인에게 심리적 안정과 안정적인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예의와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내면화되었다.
수 세기에 걸쳐 수 많은 사람이 형성한 공동의 업적인 도그마가 퇴색되고, 인간은 모든 종교적 체험의 절대적 핵심을 이루고 있는 도그마나 의식의 보호와 안내를 받지 못하고 스스로 내적 체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도그마를 상실한 종교는 도덕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일으킨 영혼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를 잃게 된 것이다. 도그마는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전통적 도그마는 이해할 수 없지만 불편하고 까다롭고 엄격한 질서를 요구한다. 거추장스럽고 복잡한 의례와 의식은 추상적인 형태로 감정적 요소를 잘 포용한다. 이러한 도그마를 따르고 반복하며 신념체계를 견고히 해왔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전통적 도그마는 단연 그리스도교에서 비롯된 도그마라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견고한 도그마를 무너뜨렸고 과학 기술은 불편함을 편리하게 만들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신의 존재는 퇴색되고 교회 해체되고 도그마는 상실되어, 서구사회는 영혼의 위험에 빠졌다고 칼 융은 우려를 표한다. 그리고 이 우려는 현실로 다가온다. 감정의 인식 변화를 따라가 보니, 영혼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 동방 세계의 사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서방 세계보다 신이 갖는 의미는 크지 않지만, 전통적인 도그마의 상실은 마찬가지다. 신보다는 공동체를 더 중요시했으며,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로 확장되는 공동체의 의미와 규율이 신과 같은 종교적 임무를 수행했다. 유교 정신과 견고한 공동체 사회가 전통적 도그마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유교적 의례와 의식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견고했던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현대인들은 공통으로 전통적 도그마는 그 힘을 점점 잃어가고 과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도그마가 형성되고 있었다. 초월적인 힘과 권능을 지닌 신은 그 힘을 잃고 점점 그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과 한계를 극복하는 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인간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든 학문적 이론, 기술이 새로운 종교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믿음의 방향이, 우주를 이해하는 수단이, 인간 사이의 절대적 약속이 이동하고 있었다. 신념체계가 바뀌고 있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엔 혼란이 퍼져나간다.
이렇게 혼란한 까닭은 우리를 지켜주던 울타리가 무너졌기 때문이지만, 이 울타리가 무너져 영영 세울 수 없게 되는 상황일까. 우리는 전통적 종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과거의 삶으로 회귀해야 할까. 과거의 울타리가 나무 목책이었다면, 석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그저 추측이지만, 사실 이런 큰 흐름과 움직임들은 일종의 새 인류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통적 종교적 사고방식의 구 인류와 진보의 서사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따르는 과학과 기술에 지배받는 이성 중심의 새 인류 말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과 신을 구분하는 법조차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경외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한계뿐 아니라 무제한을 향한 우리의 꿈을 떠올려주므로, 인식 격차를 메워줄지도 모른다." (424p)
마치며,
기준과 한계를 잃어버린 새로운 자유사회가 자아를 통제하지 못한 채 감정과 집단에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감정의 인식과 정의가 변화했듯,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수호되어오던 대부분 가치가 변화했다. 사회를 단단하게 결속시켜오던 가정은 해체되고, 신 중심 사고방식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변화하고, 무의식 세계를 지켜주던 전통적 도그마라는 울타리가 무너졌다. 현실 세계에서 가상세계로 삶의 영역은 더 넓어지고 그 경계는 흐려지는데,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규칙과 예의는 뿌리내리지 않았고 법적 제약 역시 쉽게 규정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오래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불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삶의 질서를 수호하는 것들이었다. 기술은 즐거움과 편안함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켰다. 즐거움과 편안함의 과포화가 아주 조그만 결핍에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무너진 도그마와 직면한 영혼의 위험은 감정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고 무의식 세계에 혼란을 일으켰다.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단순히 전통적 가치들을 회복시키는 것만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과거로의 온전한 회귀는 불가능해 보인다. 어떻게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질서를 형성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고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문제로 인식되는 것들을 해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들이 우리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 갖춰야 하는 것들 아닐까.
이전 [심리학과 종교]를 읽고 쓴 서평 안에서 학문적인 이론, 즉 과학, 기술, 학문은 전통적 도그마를 대신할 훌륭한 방어수단으로 언급했었는데, 그 한계 역시 분명히 존재했다. 전통적 도그마는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으며, 추상적인 형태로 감정적 요소를 잘 포용하고 있으므로 비합리적 실체를 보증하는 데 있어 유리하다는 점을 꼽았다. 신의 부재와 전통적 도그마의 상실로 인한 불안한 무의식 세계는 인간이 과거의 감정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도그마의 회복, 또는 신의 공석을 채워야 할 필요성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감정은 경제적 질서, 어휘, 이념, 신학, 기술의 변화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감정의 변화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보이기도 한다. 감정은 현대의 맥락에 맞게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이런 변화 자체를 병폐로 느끼고 과거로의 온전한 회귀와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과거로의 온전한 회귀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 변화하고 진보의 서사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가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인류가 향하는 방향과 감정의 변화 속에서 적절한 질서를 세우고,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에서 말하는 세계를 하나로 묶을 세계 공동체와 그에 걸맞은 새로운 도그마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사고방식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 세계를 하나로 묶을 하나의 공동체를 구축할 기회는 아닐까.
쓰고, 지우고, 읽은 책들을 살펴보고, 수정하고, 편집하기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설명이 부족하고 논리의 비약이 느껴지는 것 같아 글로 정리하는 내내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고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지만, 글에는 진전이 없었다. 더 다양한 지식에 갈증을 느끼고 이를 표현하는 데 한계를 여실히 느꼈다. 부디 성장의 기회이자, 앞으로 접하게 될 통찰과 지식을 잘 통합해낼 수 있기를 나 자신에게 바란다.반응형'읽은 것 >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격을 팝니다] 나를 설명하는 공용어 (0) 2020.10.27 [대유행병의 시대] 대유행병 시대에 살아남기 (0) 2020.09.24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역사로 다시 확인하는 성장의 단서 (0) 2020.07.27 심리학과 종교 (0) 2020.07.18 인간 본성의 법칙 (0) 2020.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