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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리학과 종교
    읽은 것/인문 2020. 7. 18. 05:39

    접하며,

     심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에 관한 책이다. 미지의 영역과 무의식에 대한 모호하고 어렵고 복잡한 내용에 대한 개념화가 잘 이뤄져 있다. 생소한 개념과 단어들이 많아서 읽는 데 어려움이 많지만, 등장한 개념들을 정리하며 접근하니 그나마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종교라는 단어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특정 종교, 즉 특정 교리에 국한되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을 읽은 지금, 내 안에서 종교는 무의식의 원형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로 정리되었다. 포괄적인 의미의 종교는 원형에서 비롯되었으며, 저자는 종교적 체험에서 인간 내면에 작용하는 순수하고 경험적인 입장이라는 본질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책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할 수 없지만 해보자면, 신경증이라는 관찰 가능하고 실재하는 현상을 통해 심혼의 존재에 접근한다. 논리적이고 합당한 추론으로 미지의, 모호한 심리, 정신적 영역의 근거로 이후 펼쳐지는 논리 전개의 뿌리가 된다. 신경증으로 심혼의 존재를 말하고 심혼의 경시와 신경증이라는 공상의 원인으로 꿈의 역할이 상실됨으로써 발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장 크게 작용한 두 가지 요인으로, 첫째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교에 의한 심혼의 경시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은 꿈의 역할을 상실하게 하였고 심혼을 바라보는 창(窓)이자 다가가는 주된 경로인 꿈의 상실은 결과적으로 심혼의 경시하는 사회적 풍조를 일으키게 되었다. 인간은 미개 사회 이후로 다시금 영혼의 위험에 처해있게 된 것이다.

    [심리학과 종교]를 읽고 현대의 종교를 부정하면서 종교를 믿게 되는 신기한 경험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기존의 종교의 개념에서 탈피해, 포괄적인 종교를 새로이 알고, 종교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얻고 의식의 오만이라는 병에서 벗어나게 돕는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떤 것을 모험 없이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49p)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즉 지금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상태로 만든다는 것은 위험을 감내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취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해결책들은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있는 어렵고 위험한 길에 존재한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영역 안에 문제 해결 방법이 있다면, 지금 직면한 문제에 대해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문제 해결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처음 정독을 하고 위와 같은 배경지식을 갖춘 후, 서평을 쓰기 위해 재독 하는 과정에서 내가 읽고 이해한 부분에 상당한 오해와 오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이 책의 내용이 그만큼 어렵고 추상적이며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과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칼 융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했을까. 그렇지 않다. 분명히 잘못 이해하고 내 생각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글로 쓰는 까닭은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칼 융의 생각에 접근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읽거나 칼 융의 다른 저서를 접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이해와 더욱 정확도 높은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부족하지만 글로 내 생각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모험해야 얻을 수 있는 성취를 기대하며!


    위험에 노출된 현대인

    “종교개혁 이래 프로테스탄티즘은 각종의 분파와 온상이 됨과 동시에 학문과 기술의 급속한 발달을 가져와, 여기에 현혹된 인간의 의식은 예측기 어려운 여러 힘을 지닌 무의식의 존재를 망각하여 버렸습니다.” (100p)
     이어지는 전쟁과 파국에 뒤따라 나타난 정신의 뿌리 깊은 결함은 무의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합리주의에 따라 운영되는 현대사회는 전체주의가 등장하기도 하고 낡은 신정국가의 제도를 이어받는 등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 행위는 줄어들지 않는다. 합리적으로 조직된 집단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두려운 힘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의 도그마 상실과 합리주의로 똘똘 뭉친 집단 무의식의 등장은 현대인의 눈을 가린 채 나락으로 이끄는 듯하다. 현대인들은 문명의 혜택이 일으킨 인간 고유 능력인 예지와 내성을 상실하면서 깊이 병들고 있다.

     

     

    1. 영혼의 위험

     <영혼의 위험>이란 심혼의 일부분이 다시 무의식의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를 말한다. 칼 융은 이러한 심혼의 상실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영혼의 위험>이라 불리는 무의식 세계의 위협은 개인의 차원에서는 신경증과 공상의 형태로 나타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집단 무의식에 지배당해 광기와 야수성에 의해 비윤리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영혼의 위험 결과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하거나, 목이 잘리거나, 대량학살을 당하는 일로 나타난다. 이는 과거에만 존재한 공포가 아니라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는 공포이다. 무의식 가운데 들어있는 비인격적인 힘에 대한 공포는 근거가 충분해 보인다. 비교적 미개한 사회에서 쉽게 의식을 상실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 이르러 미개 사회로 회귀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우리는 항상 화산의 분화구 위에 서 있는 셈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폭발에 대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예방할 방법이 없고, 더욱이 한번 폭발이 되어서 그 파편의 도달거리 이내에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파멸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36p)

     

     이보다 <영혼의 위험>이라는 공포심을 더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심혼을 보호하고 신념 체계를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역할을 교회가 주의 깊게 건축해놓은 많은 벽인 도그마가 수행해왔으나,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분열이 발생했다. 도그마라는 울타리가 무너지고 그 권위를 잃어버리자마자 인간은 모든 종교적 체험의 절대적 핵심을 이루고 있는 도그마나 의식의 보호와 안내를 받지 못하고 스스로 내적 체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만사를 단순화시켜 보여주는 학문적 이론을 갖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훌륭한 방어수단이 된다. 학문적이라는 간판만 붙이면 무엇이나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학문적인 이론보다 심리적인 진리라는 면에서 종교적 도그마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수 세기 간 발달시켜온 관념이거니와 그 역사와 시간, 이를 공유한 사람들의 경험이 도그마의 효용성을 증명한다. 또한, 추상적인 형태로 감정적 요소를 잘 포용하고 있으므로 무의식이라는 비합리적 실체를 보증하는 데 있어 유리하다. 심혼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학문적 이론보다 더 완전하다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도그마는 발명된 것이 아닌, 발견된 것이라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현대인들은 도그마를 잃음으로써 병들어 가고 있다.

     

     

    2. 신의 죽음

    “종교는 가장 높거나 강한 가치에 대한 관계입니다.” (161p)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사실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이 신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161p)
     압도적 힘을 가진 심리적 요소가 기능을 멈추었다. 이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신념체계의 약화와 프로테스탄트로 인한 도그마의 상실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합리주의와 학문적 이론을 믿고 따르는 현대인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신은 죽게 된 것이다. 신의 죽음과 동시에 신이 보호하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는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무의식 세계의 위협은 심혼의 상실을 일으킨다. 신의 죽음은 영혼의 위험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영혼의 위험은 광기와 야수성에 노출되어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폭력성의 표출 위협이다. 하지만 신의 죽음은 정신적 질병의 형태를 보인다. 신은 심리적 존재 안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신의 상실은 그가 가졌던 힘만큼 많은 에너지 분출을 발생시킨다. 이는 정신세계가 민감하거나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인격의 분열이라는 형태로 중요한 심리적 장애를 가져온다. 다행히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민감하지도 종교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신이라는 관념을 잃어도 아무 탈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는 대중들은 정신적인 질병을 양육하기 시작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보이는 수많은 갈등과 혐오가 양산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은 거의 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의식의 오만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은 심혼의 학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혼이야말로 의식의 모태이며 주체이고, 의식이 성립하는 근원입니다.” (168p)

     앞서 언급한대로, 현대에 이르러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신의 자리는 비워졌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이성과 지성을 통한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사고는 심혼의 존재를 의심하며 미신으로 취급해, 심혼의 존재와 무의식의 세계를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신념 체계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리스도교와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형성한 공동의 업적인 도그마가 퇴색되고 대용품으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도그마를 상실한 종교는 도덕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일으킨 영혼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를 잃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의 공석은 현대인을 심각한 의식의 오만에 빠뜨린 것이다.


    3 가지 해독제

    "편안하지 못한 양심이 지닌 가시는 이전에 무의식이었던 여러 사실을 발견하게 하고, 이렇게 하여 우리는 무의식의 영역을 넘어서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 가운데 잠겨 있는 대량 살인자의 무의식적 도구로 만들고 있는 저 비인격적인 여러 힘을 알 수 있게 합니다." (105p)
     편안하지 못한 양심이 갖는 자기비판이라는 요소는 무의식을 확장하는데 사용 가능하다. 무의식의 확장을 통해 스스로 종교적 체험에 도달하는 개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전신적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병든 현대인의 무의식 세계를 회복할 3가지 해독제의 시작은 편안하지 못한 양심으로 바라보는 냉철한 자기비판이자 메타인지 향상이다. 메타인지 시작으로 위험에 빠진 영혼을 회복할 방법을 [심리학과 종교] 안에서 찾아보았다. 아래에서 소개할 세 가지 해독제는 하나의 궁극적 목표를 말한다. 바로 신의 공석 회복과 무의식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구축이다. 신의 회복은 신을 인격화함과 동시에 상징물로 대체해 인격팽창현상을 예방하고 울타리는 학문적 이론이든 종교적 도그마든 상관없다. 신념 체계를 구축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만일 종교적 인간임에도 신경증과 공상에 고통받는 영혼의 위험에 빠졌다면, 만다라의 상을 빌릴 것을 제안한다.

     

     

    1. 의식과 무의식을 자연스럽게 공존시키기

    “그대는 그대 자신과 더불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동안에 그대 자신과 곧 화해하라.” (156p)
     나 자신과 화해는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으로 나타나는 무의식과 화해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 다 하나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의식과 무의식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억누르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와 무의식 간의 괴리가 커질수록 의식과 무의식이 역전되는 영혼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의식으부터 억제되고 고립되는 경우 절대 화해를 끌어낼 수 없다. 무리한 억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분화구를 만든다. 화산의 분출을 막기 위해 엄청난 의식적 노력이 따른다. 억제하기보다 현명하게 해소하고 그림자와 공존할 방법을 고안해내, 그것을 내면화시켜 일상에 녹여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안의 공석을 채울 필요가 있다.
    “만다라는 <결합을 가져오는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과 인간의 결합이 그리스도나 십자가의 상징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 환자의 꿈에 나온 우주 시계도 그와 유사한 두 가지를 결합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59p)
     만다라가 갖는 결합을 가져오는 상징이란, 무의식을 대하는 의식적 태도를 말한다. 심혼과 신을 합일시킴으로써 심혼은 해독된다. 무의식 세계에 신념 체계를 구축해 신을 회복할 기회를 얻고 신을 인격화함과 동시에 상징물로 대체함으로써 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그마와 신을 회복해 무의식 세계에 안정을 가져와 유의미한 삶을 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믿을 수 없을 만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이 우선 어려운 점입니다.” (156p)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의식계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신념체계를 회복해 무의식계에 안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유한한 삶 속에서 평생에 걸쳐 실현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불안에 대항할 확신을 주는 신념체계를 갖추고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로운 공존을 도모해야 한다. 억제된 그림자라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만다라를 통한 신과의 결합이 온전한 인격으로 거듭나게 한다.

     

     

    2. 투영을 거두고 본질을 바라보기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투영을 후퇴시키고 의식적인 인식을 발달하게 된다. 근대 과학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어떠한 투영물이라도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왔다. 본질 간 결핍된 간격에는 모두 투영물로 메꿔져 있는 투영이라는 환상의 홍수 속에서 사는 것이다. 투영은 실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다. 그런 투영의 과포화 상태는 대상의 본질을 가려버린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너무 부끄러움 없이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66p)

     

     투영을 제거하고 본질을 바라보려 노력한다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그림자를 상당 부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문제이자, 문제의 해결 방법이 된다. 문제라고 여기는 대부분은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한 것이고 투영을 거둔 채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문제의 발생은 자신의 그림자 투영으로 비롯됨을 알 수 있게 된다.

    “세상에서 무엇이나 자기 자신 가운데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고, 그리고 만약 그가 자신의 그림자를 처리하는 법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세상을 위해 어떤 실제적인 일을 한 것이 됩니다.” (167p)

     

     

    3. 종교적 체험 받아들이기

    “종교 체험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그것은 생명과 의미와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고, 세계와 인류에게 새로운 빛을 주는 위대한 재산이 됩니다.” (185p)
     종교체험이라는 내면적 체험은 분명히 실재하고 있고 절대적이다. 체험만큼 분명한 것은 없다. “물질적인 존재는 단순히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질에 대하여 아는 것은 감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와 진 심리적인 상을 지각하는 동안에만 가능하기 때문”(28)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를 떠올려라.


    “사실상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게 해주는 용기를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진리가 있을 수 있을까요?” (185p)

     

     이 말 만큼 종교의 필요성을 더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 있을까. 앞서 저자는 신경증, 영혼의 위험과 공포심에 대응하는 방법은 ‘극복하기 어려운 불합리’를 상쇄할 만큼 강력한 가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체험만큼 분명하고 절대적이며 강력한 가설은 없다. 또한, 종교적 체험이 노이로제와 콤플렉스에 의한 신경증에 효험이 있다면, 종교적 체험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합리주의에 배반하기 때문에 종교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은 합리적이지 않다.
    “내가 지지하는 것은 중대한 위험에 대한 방어수단인데, 그때 나는 그 방어방법이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궁극적 진리일 것이냐 어떨 것이냐 하는 학문적인 문제는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방어방법이 유효하다면, 그리고 유효한 한에서 나는 만족할 것입니다.” (95p)
    우리는 합리적인 수단을 취해야 한다는 합리주의적 투영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단이 목적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 그래야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한에서의 진리를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인생이 자기를 위해서나? 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더욱 건전하고, 더욱 아름답고, 더욱 완전하고,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된다면, 이 경우 우리는 안심하고 <이것은 신의 은총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187p)
    [기묘한 이야기]라는 넷플릭스 시리즈가 떠올랐다. 윌리엄이 데모고르곤에게 납치당하게 되는데, 윌리엄의 엄마인 조이스 바이어스가 칼 융이 말한 태도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이 아닐까. 모두가 조이스에게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 사실로 치부하고, 허상에 대해 떠든다며 정신이상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조이스는 본인이 직접 경험한 체험을 믿었고 그랬기에 집요한 노력으로 아들을 구할 수 있었다. 종교적 체험자들이 삶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나아갈 수 있고 노이로제에서 극복할 수 있다면 종교적 체험을 인정하는 것만큼 합리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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