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군읽은 것/~2024 2020. 2. 29. 05:19
- 접하며
사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제대로 접한 경험은 없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수준에 머물 뿐이다. 그런데도 [폭군]이라는 책이 주는 묵직하고 강렬한 메시지가 나를 끊임없는 물음에 빠지게 하였다. 아주 먼 과거의 영국 왕실에서 벌어진 권력 찬탈 전쟁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점차 현재 나의 삶으로 다가온다. 독재라는 절대 권력을 향한 폭력은 수많은 역사 속에 남아있다.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최근 본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많이 생각이 났고, 독재라는 존재는 점차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결국 내 안에서도 접할 수 있었다. [폭군]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담아낸 글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역자 후기'이다. 복잡한 생각과 고뇌 속에서 힘든 독서를 한 후 맞이한 역자 후기가 아주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난 이 책을 감히 어설픈 내 글에 압축해서 모두 담아내려는 오류는 범하지 않으려 한다. 책을 읽으며 고뇌에 빠지게 만든 부분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개인적으로 생각을 가다듬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 차별과 권리와 혜택
"태초에 인간은 모두 평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65p)
케이드의 아버지를 미장이였음을 폭로하는 스태퍼드에게 지지 않고 대꾸하는 말이 상징적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정원사였지." 민중 선동가인 존 케이드는 차별로부터 민중들의 동의를 끌어낸다. 민중들은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또한 하나의 인간으로,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이들은 이러한 차별을 해소하고 당신들의 권리를 되찾고자 한다. 그 권리는 '평등'이다. 이들은 폭력으로 법과 체제를 무너뜨려 자신 위에 군림하는 자들을 자신의 자리로, 아니 오히려 그 아래까지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이들 역시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군중이 원하는 것은 그런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 신의를 무시하고, 약속을 위반하며,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58p)
"군중은 그(케이드)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돈을 밝히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그들의 꿈을 대신 말해주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모든 것은 공동 소유가 될 것이다.'"(59p)
정의, 대의, 선 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행동은 결국 개인의 이익에 의해 발생한다. 케이드가 주장한 '공동 소유'에 열광하는 군중들이 이를 증명한다. 군중 앞에 선 사람이 위선자든 사기꾼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 위에서 부를 취하는 자들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을 뿐이다. 이들은 부당함에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이들의 행동은 또 다른 부당한 문제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이 선동은 성공하더라도 실패한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 없이, 욕심과 이익을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또 다른 부당한 체제를 생산해낼 뿐이다. 눈 앞의 이익만을 좇는 선동된 군중들이 주장하는 '이상'은 지속될 수가 없다. 제2의 케이드를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렇게 분노케 한 차별이 뭐란 말인가.
"케이드가 적개심을 불붙인 가난한 군중은 사회로 뭐 따돌림당하고, 경멸받고, 막연하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거에 신비로운 기술로 여겨진 기술(문자 해독)을 점점 더 강하게 요구하는 경제로부터 소외됐다." (60p)
"민중 선동가의 언변이 어리석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런 말이 끌어내는 웃음은 그 위협을 단 한 순간이라도 줄여주지 않는다." (63p)
민중들은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자 해독 기술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무지를 보며 비웃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라고 다를까.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를 얼마나 수용하고 체화시켰나. 차별은 현대에 이르러 더욱 심화하여 가고 있다. 기술의 발전과 시스템의 변화는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자, 현대 사회 속 나는 문자를 익힌 사람인가. 문자를 익히지 못한 사람인가.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가 부당한가, 변화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능한가. 이에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변화로 인한 발생한 차별이 심해지는 사회는 위험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차별은 은은하게 사회로 퍼져나간다. 사회에 차별이 만연해지면 이내 차별은 곧 계급으로 군림한다. 우리가 차별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층민의 반란이 지주 계급에 일으킨 공포와 혐오감을 적절히 투사했다."(65p)
셰익스피어는 차별이 사회에 만연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속하는 차별은 엄청난 에너지를 축적하고 세상을 뒤집으려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차별에 대한 잘잘못과 책임을 묻기 이전에 차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질서로 만들려는 민중의 분노가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를 퇴행시키는 사태를 예방해야 한다. 소외된 자들에게 적절한 복지와 교육은 필수라는 것이다. 그러니 경멸의 시선을 거둬라. 갈등을 더 악화시키고 피가 난무하는 살육을 보고 싶지 않다면. 케이드의 어리석은 언변만큼 현재의 차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현재 존재하는 부조리한 체제를 유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 웃기긴 하겠다.
"넷째, 합법적인 온건한 지도자는 대중의 감사나 지지를 기대하지 않는다. (중략) 배신에 대하여 더는 처벌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미덕에 대해서도 더는 보상이 없다고 봐야 한다." (71p)
"이렇게 잘 대해주었는데 왜 그들이 나보다 에드워드를 더 좋아하겠는가?"-헨리 6세(72p)
위에서 차별에 대해 살펴봤다면,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헨리는 온건한 왕이었다. 민중의 권리를 지켜준 왕이었다. 민중들은 권리를 지켜준 헨리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해야 했다. 하지만 헨리가 죽는 순간까지 그를 위해 군중이 달려오는 일은 없었다. 올바른 정치란 무엇일까. 대중들은 차별 위 권리를 고마워하는가, 권리 위 혜택을 고마워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차별 위 권리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별이 만든 법과 체제에서 만들어진 처벌 없이 미덕을 찬양하는 민중은 없다. 권리는 어느새 산소나 물보다 더욱 가치가 가벼워지고 혜택을 권리처럼 누리길 바란다. 스스로 차별과 권리와 혜택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선동에도 쉽게 휘둘리고 만다. 자신을 지켜준 권리를 잃고 차별에 노출되어 눈 앞에 펼쳐진 노예 같은 삶에서 발버둥 치게 될 뿐이다. 무지를 깨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선동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 차별에서 벗어나 혜택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제대로 된 교육이야말로 민중을 선동하는 독재자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 독재의 운명
"필요가 만들어낸 기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70p)
"그의 당파는 힘이 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웃거렸고, 설사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힘을 키울 수 있는 일이라면 하려고 했다." (70p)
필요란 절대 권력의 유지를 의미하고 기만이란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독재라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가치와 체계를 무너뜨리고야 마는 것이다. 정통성은 점차 희미해지고 절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미래를 파는 행위를 서슴지 않게 된다. 독재라는 위험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몰락으로 향하는 길에 오르고 만 것이다.
"그를 왕좌에 밀어 올린 교활한 전략은 국가 경영의 비전이 될 수 없었다." (120p)
개인이 아닌, 조직을 운영한다는 것은 비전이 필요하다. 비전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다. 하지만 독재라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가치를 무너뜨리고(정체성 붕괴) 가치에 맞지 않는 전략을 취한다. (비전 상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잃은 조직은 결국 나아갈 방향을 잃고 낭떠러지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치중한다. 국가 운영의 악순환에 빠져 독재 정권은 몰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독재자 개인의 삶은 어떨까.
"국정을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통치로 돌아가게 하고자 모든 사람이 막 빠져나온 악몽을 집단으로 잊어버리기를 희망했다. 이런 건망증의 정신에 따라 그는 자기 당파가 저지른 유혈극을 '씁쓸하고 짜증 나는 일'로 규정했다." (72p)
독재자는 자신이 비집고 들어온 틈을 메우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 절대 권력에 취해 불안을 느끼며 권력 유지에만 힘쓸 뿐이다. 자신이 열고 들어온 문을 부정적으로 해치워 버리고야 만다. 그는 정통성을 잃고 명분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악으로 시작해 악을 끝맺음 지을 명분을 말이다. 이게 악순환의 시작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짓밟고 들어선 절대 권력 뒤로 펼쳐진 잔해에 또 다른 독재의 씨앗이 자란다. 악몽을 악몽으로 인정하며 유혈극을 직시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권의 정당성 찾고 악을 청산할 수 있다. 제왕이라 불리던 자들의 업적을 돌아보라. 그들은 정복한 땅을 어떻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나. 독재자는 탐욕과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파괴를 일삼은 것에 부끄럼을 느끼고 과거를 외면한다. 자신이 불태운 잔해 속에서 피어날 또 다른 독재자를 두려워할 뿐이다."그러면 또 불안 증세가 일어나겠구나. 맥베스는 폴리언스가 달아났다는 보고를 받고서 말한다." (144p)
"독재자는 미래를 적으로 삼는 것이다." (146p)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 현재의 권력 유지에 혈안이 된 독재자는 불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불안의 씨앗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처음엔 분명 씨앗은 몇 안 되었는데, 없애고 없애다 보니 본인이 서 있는 자리 아래 모든 것이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독재자는 미래를 적으로 삼는다. 현재 만연한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가치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며, 국가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와 손을 잡는다. 더는 미래는 독재자의 편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재자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갈 뿐이다. 결국 "독재는 인내 앞에 전율하게 될 것입니다."(179p)라는 허마이오니의 말 그대로 실현된다.
독재자는 악에 기원해 절대 권력을 손에 쥔다. 그는 성공한 것일까. 정통성과 명분이 없다면, 절대 권력이라는 왕관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진다. 독재자의 머리 위엔 왕관이 아니라 불신과 불안이 올라선 것이다. 이 불신은 불안을 부르고 독재자를 고독하게 만든다. 악순환의 고리에 올라타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다. 불신은 조급증을 부르고 판단에 오류를 만든다. 이 오류가 쌓이고 쌓여 그를 낭떠러지로 내몰고야 만다. 왕관은 점점 무거워지는데, 자신이 목이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왕관을 지키려는 독재자는 고독하고 쓸쓸하게, 자신조차 자신을 등지게 한다. "오 그건 아니야.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어." (129p) 자신을 그렇게도 믿고 자신을 사랑했던 리처드 3세조차 자신을 외면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독재자는 절대 고독과 허무에 잠기고 만다."내일, 내일, 또 내일. 하루하루는 기록된 최후의 순간까지 일부 일보 기어든다. 우리의 어제라는 날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비춰준다. 꺼져라, 꺼져. 단명한 촛불아. 인생은 그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맡은 시간만큼 거들먹거리고 노심초사하지만, 그다음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바보가 지껄이는 소리, 소리 높여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이야기." (151p)
맥베스의 진실한 성찰의 순간처럼 독재의 끝은 허무하다. 리처드 3세와 같은 결말이 눈앞에 놓여있지만 막을 도리가 없다. 탐욕의 끝은 허무하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것을 이루면 나는 어떨까. 진정한 나로 향하는 길에 헛된 욕망을 이정표에 넣지 마라. 성취를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성취를 이뤄라. 나를 끊임없이 진실한 성찰로 비춰라. 성찰에 비춰 반사된 진실의 길로 향해라.
-정의 내리기
"폐하의 정의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172p)
정의는 부정당할 수 있다. 정의는 모두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나의 정의는 무엇인가. 정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브루투스는 개인적 대의에 대비되는 일반적 대의, 즉 공익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의 기다란 독백은 추상적인 정치 원리와 구체적인 개인들 사이에 뚜렷한 구분 선을 그으려는 노력을 훼손한다." (200p)
[폭군]을 읽으며 가장 고뇌에 빠지게 한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브루투스가 범한 오류가 무엇일까. '내 생각엔' 추상적인 정치 원리와 같이 정의 내리기 모호한 가치에 구체적 개인들의 이익이라는 잣대를 통해 정의 내리려 한 것이 아닐까. 여전히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올바른 행동 노선을 잘 몰라서 혼란스럽고, 취약하고, 갈등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무엇이 그들을 행동에 나서게 하는지 희미하게만 알았다." (200p)
"그들의 모호한 개인적 동기들은 거대한 공적 참사를 가져왔다." (201p)
모름지기 철학적 탐구와 행동은 함께 키워나가야 하지만, 로마인들은 행동하기를 더 큰 가치로 생각했고 이들은 철학적 탐구는 그리스인들에게 맡겼다. 그 결과 정체성이 희미한 그들은 서로 뒤엉킨 여러 개의 문제 앞에서 모호하고 개인적인 동기로 행동을 취했다.
"모든 선택에 부수되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게 필요했고, 브루투스는 시저를 암살하기로 한다." (203p)
정체성과 가치관에 관한 탐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확실성 앞에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거대한 공적 참사를 불러오는 것이다. 공익에 근거해 모두를, 모든 것에,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정체성과 가치관이 확립된 상태에서 얻은 신념에 따라 행동하길 바랄 뿐이다. 개인의 잣대로 공익을 판단하고 행동에 임했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반드시 결과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내고자 해라. 그게 자신의 신념을 지킴과 동시에 공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공익은 추상적 정치 원리로, 구체적 개인이 이 원리 안에서 행동을 통해 얻는 결과는 예측 불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은 내 개인적 동기로 이뤄진 모호한 행동이 정말 공익을 가져올 수 있을지/없을지 혹은 공익을 저해하는 요인을 제대로 판단하고 제거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예측 불가능성을 [폭군]에서 소개된 많은 독재자가 경험했다. 강한 신념을 지닌 독재자들조차 이 예측 불가능성 앞에 자멸을 면치 못했다. 하물며 미숙한 자아를 가진 자들은 어떨까. 어찌 그런 미숙한 개인이 공익을 예측하고 판단을 내린단 말인가. 이것이 브루투스가 범한 오류이다.
모든 개인은 각자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경험적 원칙을 내세워 판단하고 행동한다. 각자가 정의(옳음)를 주장할 뿐, 결국 정의(입장, 관점)만 남고 정의(옳음)는 없다. 개인이 공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우선 되는 것은 정체성과 가치관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나를 바로 세우고 신념으로 행하라.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질 불확실한 미래를 책임져라. 그것이 개인의 정의가 공익으로 가는 방법 아닐까. 나의 정의를 바르게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볼룸니아는 아들의 남자다운 정체성이 위태롭게 되었고, 그는 처음부터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31p)
자신에게 비롯된 정체성이 아닌, 타인이 배양한 정체성의 위험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코리올라누스'이다. 편협한 가치관과 일방항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자신의 가치 반대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 안에 내재시키지 못하면, 가치관을 흔드는 충격에 가치관이 무너지고 만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를 양립시키는 것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신념을 펼쳐나갈 때 어떤 것이 위협되는지를 알고 그 위협을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를 통해 얻은 통찰은 딜레마가 주는 충격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타협 불가능한 가치와 중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안티프레질한 가치관을 세울 수 있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정의는 부정당할 수 있다. 정의는 모두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신념은 다르다. 정체성과 가치관은 나의 세계이다. 그 세계를 실행하는 힘이 신념이다. 신념을 부정당해도 낙심할 필요 없다. 신념은 나의 행동 원리일 뿐이다. 내가 부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 부정이 타당하다면 내 세계를 필요에 따라 덧붙이고 덜어내며 나에게 맞춰 진화시킬 뿐이다. 잊지마라.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가 내 신념을 더욱 견고히 만든다.
- 마치며,
아직도 [폭군]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시 돌아보며 내가 잘못 이해한 부분을 발견했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폭군]이 제공한 고뇌와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가져야 했던 고통의 시간은 나를 성장하게 도왔다(아마도). 이런 통찰을 제공한 저자 스티븐 그린블랫과 이종인 번역가님에게 새삼 감사를 느낀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꼭 그의 희곡들을 제대로 즐겨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저자의 에필로그에서 만난 셰익스피어에 대해 놀라움으로 이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공식 전략은 오히려 의도한 것과 달리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기존의 가치 체계가 엄청난 사기라는 느낌만 강화할 뿐이다." (243p)
이렇게 독재에 대한 희곡들을 써내가며 대중을 대변했다고 생각했던 셰익스피어는 사실 부자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는 무질서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체제의 수호자였다. 그래서 그는 공식 전략을 택하지 않고 '돌려말하기'를 통해 그는 은근하게 대중들의 분노를 해소해주며, 부유한 자들의 음모와 탐욕을 까발리는 예술가의 삶과 성공적 극작가로 자신의 부를 쌓는 기득권의 삶을 모두 누렸다. 셰익스피어가 약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급진적인 변화 촉구는 '코리올라누스'의 결말을 부를 뿐이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로 대중의 곁에서 창작을 지속하면서도 개인의 안정적인 삶을 영위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