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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지나쳐선 안 되는 것들읽은 것/문학 2024. 9. 26. 18:27
01
얇고 가벼운 책이어서였을까?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읽고 넘어가려 했던 나는 책을 덮자마자 다시 첫 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책이 읽기에 불편한 것도 아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이 남았있었다. 천천히 다시 읽어보며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인상을 받았고 더 깊은 감상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란 제목과는 달리, 작고 사소해 보인다고 해서 지나쳐선 안 될 중요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책은 힘들었던 가정형편, 평생 알 수 없는 친부와 그의 소식,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그리고 모두가 힘들고 혹독한 시기를 살았던 한 남자, 펄롱이 마주한 선택을 이야기한다. 그는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했기에 생기는 결핍이 있었고, 여유 없이 살아야만 했기에 자신을 충분히 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갈 곳 없는 어머니와 자신을 받아주고 여러 기회를 제공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고 덕분에 사랑하는 아내와 슬하에 다섯 딸을 둔 가장으로써 살아갈 수 있었다. 빈주먹으로 살아왔지만 펄롱은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며, 빠듯하게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선한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든 모든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을 성실한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살았다. 성실함을 바탕으로 일꾼 여럿을 둔 석탄-목재상의 주인이자 다섯 자매의 아버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른 아침, 석탄 광문 빗장에 단단히 성에가 낄 만큼 추웠던 겨울날, 펄롱은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와 엉망인 꼴로 밤새 자신의 트럭에 숨어있던 한 소녀를 마주하게 된다.
02 원하지 않았던 선물
이듬해 펄롱이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부상으로 밀어서 여는 뚜껑을 자로도 쓸 수 있는 나무 필통을 받았을 때, 미시즈 윌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윌슨이 말했다. 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돌아다녔다.
직소 퍼즐을 받지 못해 슬퍼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자신의 결핍을 아버지의 부재로 연결했던 펄롱이었다. 하지만 네드의 보온 물주머니 선물에서 따뜻한 온기를, 윌슨 여사의 책 선물에서 성취와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윌슨 여사의 칭찬에 슬픔과 결핍을 잊을 만큼 내면에 차오르는 충만함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게 늘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고, 자신이 싫어하고 관심 없는 게 늘 부정적인 결말을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좋고 싫고, 크고 작고, 중요하고 사소한,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마주할 수 있다. 무엇이든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일부가 되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과 의미는 실천과 경험을 통해 ’나의 삶과 함께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자신 안에 깊숙이 자리한 정체성을 마주하고 ‘나’와 ‘삶’에 방향성을 부여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펄롱이 선물을 작고 쓸모없는 것으로 내버려뒀다면 성취와 성장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펄롱은 네드의 보온 물주머니를 사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네드의 따뜻한 배려와 걱정스러운 마음을 마주하고, 감사와 춥고 외로운 밤을 위로해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윌슨 여사가 선물한 책을 읽으려는 의지와 모르는 단어를 찾고 알아내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맞춤법 대회 1등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건넨 가슴 벅차오르는 칭찬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직소 퍼즐을 받았다면, 자신 안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어린 자신의 마음을 발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결핍에 의한 감정과 경험은 자신을 괴롭고 힘들게 만들지만, 성숙하고 자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만을 바라고 기대하면 실망하고 상심하기만 할 뿐이다.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고 나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던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곤 한다. 그 중 가장 빛나는 가치는 이면의 가치를 찾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체득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아닐까.
펄롱은 기대했던 선물이 아니라 작고 필요하지 않던 선물에 실망했지만, 자신을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들이 준 선물에 담긴 진정성을 찾고 마주하고 나서 그 어떤 선물보다 크고 소중한 선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03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중략)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 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펄롱은 평소 약속보다 이르게 배달 간 수녀원에서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들이 추레한 모습으로 죽어라고 바닥을 문지르는 모습을 마주한다. 그 중 한 아이가 수녀원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고 침묵했던 자신에게 큰 실망을 한다.
선(善)을 실현하기 위해 선(線)이 요구된다. 선(善)의 상징이자 신성한 영역인 수도원의 부도덕성을 고발한다는 건 많은 용기가 요구된다. 드러나지 않는 것엔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파헤친다는 건, 단순히 알고 싶다는 호기심만으로 책임질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모든 비밀엔 사연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연을 알게 된다는 건 상상치 못한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될 때가 있다. 진실에 다가갈 기회를 마주해도 진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폐쇄적 집단에 진실을 증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권위에 도전한 대가를 치르기엔 펄롱이 짊어진 현실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다. 사건의 전후 사정을 전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현실과 타협하고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날 빈틈이 되어준다. 하지만 펄롱과 같이 선한 가치관을 갖고 삶을 사는 사람에겐 벗어날 수 없는 점차 무거워지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그때 선(線)이 요구된다. 불분명한 기준에 의해 이도 저도 못하고 방황하는 자신에게 채워진 족쇄를 벗어날 수 있게 돕는다. 기준이 되는 선을 넘어야 비로소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아일린은 선(線)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행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녀에겐 가족을 지키고 다섯 자매를 양육할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아일린의 말은 다소 차갑고 정 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녀가 펄롱보다 빠르고 단호하게 판단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가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선(線)이 있었기 때문이다. 펄롱은 자신이 믿어온 선(善)에 혼란을 느꼈고 선을 경계가 흐려져 어떤 행동도 판단도 내리기 어려웠다. 아일린에게 던진 물음은 선(線)을 찾기 위함이었지만, 펄롱은 자신과는 너무 다른 선을 가진 아일린의 대답에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곤 한다. 선은 기준은 모두 같지 않으며 그 실천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점, 그리고 선은 생각보다 그 경계가 칼로 잘라낸 단면과 같이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펄롱이 마주한 순간은 그 불명확한 도덕적 판단의 경계를 보여준다. 절대적이라 여겼던 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이 아니라 면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선을 추구하는 펄롱이 도움을 요청하는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혼란에 빠진 까닭은, 자신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선을 추종하는 위선자여서도 아니다. 수녀원에서 펼쳐진 비윤리적 행태를 보고 진실을 파헤칠 수 없었던 까닭은 선의 모호성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눈앞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가치관과 앞장서서 선을 실천해야 할 수녀원이라는 절대적 선의 상징이 충돌하자, 자신이 생각한 선한 세계관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진 않을까. 설마 수녀원에서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설령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내가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수녀원의 아이들을 돕기 위해 수녀원에 맞서는 것과 아내와 다섯 아이의 안정된 삶, 더 나아가 곤란해지거나 요동치지 않도록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우선시해야 할 선일까. 도덕이라는 선은 결코 깔끔하게 딱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경계에는 불확실하고 애매한 모호함이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는 늘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선다.
04 누군가는 한 번도 느껴 볼 수 없었던 따뜻한 세계
시내 중심 크리스마스 전등이 켜진 곳이 가까워지자, 먼 길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펄롱은 용기를 내어 평소에 다니던 길로 계속 갔다. 그때 아이가 뭔가 달라지는 것 같더니, 곧 걸음을 멈추고 길에 토하기 시작했다.
“잘했다” 펄롱이 다독였다. “다 게워내. 속에 든 거 시원하게 비워.”결국 펄롱은 수녀원에서 도망쳐나온 아이, 세라를 돕기로 마음 먹는다. 단호해 보이는 결심과 행동이었지만 세라를 수녀원에서 불러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기까지, 심지어 함께 집을 향해 가는 길에도 펄롱은 끊임없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내 행동이 정말 옳은 것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 길의 끝에 도달해야만 알 수 있었다. 길 위에서는 아무리 머리 싸매고 주저앉은 채 고뇌해봐야 결코 알 수 없다. 멈춰있을 게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세라는 변화의 길 위에 있었다. 분명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는 차갑고 어둡고 외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펄롱이 이끈 크리스마스 불빛 가득한 따뜻한 세계를 마주했을 때 아이는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토를 하고 말았다.
펄롱과 세라로 대변되는 따뜻한 세계와 차가운 세계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믿고 살아가는 다양한 세계관이 수없이 많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관과 세계관이 맞닿는 경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빈틈없이 견고해 보이는 세계 간 경계도 경험을 통해 그 경계가 생각보다 쉽게 허물어지기도 한다. 자신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나의 세계가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살이를 경험하며 조금씩 부모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때로는 원망스럽고 때로는 도저히 공감하기 어려웠던 부모님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부끄러움을 가장 먼저 느꼈다. 뭐든 처음이 미숙하듯이 부모라는 역할이 처음인 부모님의 서투름에 불평하고 미워하며 내뱉은 나의 말과 행동을 다시 되돌릴 수 없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못난 나를 인정하기가 어려워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 다름을 알고 존중할 수 있게 되었고 나를 향한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한참이 흘러서야 비로소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제야 관계에 여유가 생겼다. 내 세계를 알려 드리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비로소 이 관계가 안정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이 나에 대해 얘기하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감사하다는 말과 존중하는 행동을 계속하다보니, 비로소 서로 같은 세계 속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진정으로 마주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세라의 구토를 보며 나의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세계를 인지하고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변화의 시작이자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세라는 자신이 살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고 당연하지 않았으며 따뜻함에 닿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 안의 차갑고 음울한 것들을 인지하고 말았다. 그만큼 자신의 세계가 견고했다는 방증이었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다르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대 세계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괜찮던 생각과 감정들이 비로소 균형을 이루듯 제자리를 찾아가자, 부정하고 찝찝한 그것들을 게워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맞이할 따뜻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비워내야만 했다. 구토는 당장 고통스러울지라도 긍정적인 변화의 신호였다.
05 우리가 지나치는 작고 사소한 것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왜 우리는 선행을 어렵게 느끼는 걸까? 많은 이야기에서 교훈으로 등장하는 선은 숭고하고 고결한 무언가로 표현되곤 한다. 분명 그런 선은 특별하고 아름다운 가치지만 그런 선은 자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펄롱의 이야기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다행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굳게 믿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이 펄롱에겐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펄롱은 세라와 비슷한 차가운 세계에서 태어났다. 천운으로 어머니가 일하던 곳의 고용인이었던 미시즈 윌슨 덕분에 따뜻한 세계로 발을 들이고 그 품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사람을 구성하는 사소한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 모두 우연한 게 없다. 펄롱의 선하고 옳은 가치관을 형성하게 도와준 건, 우리가 자주 접하는 교훈 있는 이야기 속 목숨과 맞바꾼 희생이나 거악에 맞선 용기가 결코 아니었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고 마는 아주 작은 선의와 배려, 그리고 사랑이었다. 작고 사소하지만 크고 위대한 가치를 지닌 이것들이 펄롱과 그의 주변을 이루는 모든 것, 모든 사람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변화시키고 성장시켰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주고 받는 인사말, 걱정과 불안을 나누고 이겨 낼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북돋는 말, 힘없이 축 처진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 같은 작은 선의가 담긴 모든 것들 말이다. 미시즈 윌슨 역시 자신이 펄롱에게 내민 손과 같은 누군가에게 받은 선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미시즈 윌슨에서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시작되어 미시즈 윌슨에게 주어진 선한 의지는 펄롱에게로 이어졌고 이제 그 의지는 세라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따뜻한 배려와 사랑의 세계는 이렇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분명하다. 선의 의지가 계승되고 순환하며 그 힘을 유지하고 더 커지기도 하면서 이 세계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닐까.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격려와 용기가 이 세계를 유지하는 힘인 셈이다. 내 안에 깃든 선한 의지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같은 이야기가 더 많이 소비되길 바란다.반응형'읽은 것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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