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지향하는 나(변호사)는 갑작스럽게 늘어난 일에 추가 인력을 고용하는 과정에서 필경사 '바틀비'를 만나고 생긴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변호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일의 특성상 흥미롭고 별스러운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잦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바틀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창백하고 말쑥하고 점잖으며 쓸쓸한 인상의 바틀비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엄청난 집중력으로 놀라운 분량의 필사를 해냈다. 그의 근면·성실함에 크게 기뻐했던 일도 잠시,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검증한 필사본을 검증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내뱉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사람이 아닌 듯한
-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는 식사하러 나가는 일이 없었다. 사실 그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그때까지 그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구석의 영원한 초병이었다. - 일요일 아침, 내 변호사 사무실에 기거하는 바틀비, 그러면서도 신사처럼 흐트러짐 없지만 주검 같은 느낌을 주는 확고하고 침착한 바틀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바틀비의 출현은, 내가 다름 아닌 내 사무실 문전에서 그대로 슬그머니 물러가, 그가 원하는 대로 했을 만큼 내게 이상한 영향을 미쳤다. -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최근에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 나도 모르게 ’택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일을 처리하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가뜩이나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자리를 음침하게 굴처럼 만들어 놓질 않나, 몸서리치게 싫어해야 할 일하는 곳에서 기거하는 바틀비를 보고 누가 인간처럼 느낄까. 바틀비의 이런 모습은 창백하다 못해 주검같이 느껴지는 특이한 외모마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마치 유령이나 악마와 같이 '인간이 아닌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아닐까?' 라고 말이다. '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는 바틀비 특유의 말투를 따라 하는 변호사와 사무실 동료들을 발견하며 변호사는 바틀비를 내쫓아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저는 필사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명백한 사실은 이제 그는 내게 목걸이로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하기 괴로운 맷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동정이 갔다. “이제 다시 필사를 계속할 준비가 되었나? 자네 눈이 회복되었어? 오늘 오전에 짧은 서류를 필사해 주겠나? 아니면 몇 줄 검증하는 걸 돕겠나? 아니면 요 앞의 우체국에 좀 다녀올 텐가? 무슨 일이든 자네가 사무실을 떠나기를 거부하는 구실이 될 일을 하긴 하겠는가 말이야.” (중략) 그러나 내 안에서 분노한 태초의 아담이 일어나 바틀비와 관련해서 나를 유혹했을 때 나는 그와 씨름하고 그를 내동댕이 쳤다. 어떻게? 그야 물론 신의 명령을 상기했을 뿐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중략) 이 세상에서 내 사명은, 바틀비 자네가 머무르기로 결정하는 기간만큼 사무실을 자네에게 제공하는 것이야.
바틀비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변호사의 대응이다. 아무리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이라 해도 변호사와 바틀비의 관계는 분명 이상했다. 바틀비의 기행이 더해질수록 포용하는 과정에서 고통은 더해졌지만, 늘 바틀비를 내쫓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변호사는 기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바틀비의 행동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양심과 자기애를 충족시키곤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변호사의 대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바틀비가 처음 일을 거부했을 때부터 내쫓기보단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바틀비를 발견하고도 '가엾고 안타까운 친구를 사랑으로 보듬는다'는 결정은 절대 평범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틀비로 인한 기묘한 사건들에도 변함없는 변호사의 태도는 '바틀비에게 묘한 마력이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상상하게끔 만든다. 변호사를 홀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며 스스로 납득하지 못할 행동마저도 합리화하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바틀비는 마치 유령이나 악마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항할 수 없는
- 바틀비에게는 이상하게 나의 성질을 누그러트릴 뿐 아니라, 놀랄 만큼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당혹스럽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 나는 접문을 닫고 다시 바틀비를 향해 전진했다. 운명에 도전하도록 또 한 번 부추김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저항의 대상이 되기를 열망했다. - 나는 한가한 틈틈이 ’에드워즈의 의지(자유의지)’와 ‘프리스틀리의 필연(철학적 필연의 원칙)’에 관해서 조금 연구했다. (중략) 나는 그 필경사와 관련된 걱정거리들이 모두 영겁의 세월 전부터 예정되었으며, 바틀비는 전적으로 지혜로운 신의 어떤 신비로운 뜻에 따라 나와 함께 살도록 숙사를 배정받았다는 확신에 점점 빠져들었다. - 이 세상에서 내 사명은, 바틀비 자네가 머무르기로 결정하는 기간만큼 사무실을 자네에게 제공하는 것이야.
바틀비가 단지 인(人) 외의 존재라고 생각함으로써 변호사의 대응을 이해하기엔 여전히 비약이 크다고 느껴졌다. 비현실적인 능력이 발현되는 묘사가 있었다면 모를까, 악마나 유령이라는 생각은 단지 나의 추측에 불과했다. 변호사 역시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감정이 평소와 같지 않고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변호사는 바틀비와 갈등이 생기고 대립할 때마다 저항할 수 없는 힘, 마치 운명에 도전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변호사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시도를 통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시험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운명을 인지함과 동시에 저항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자기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변호사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바틀비를 자신의 운명 속 당연히 존재할 고난과 역경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바틀비에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내쫓고 싶다는 충동을 유혹이나 악령이라 부르며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했다. 변호사는 자신의 영혼을 훼손시키지 않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바틀비를 사랑으로 보듬어줘야 한다는 의무를 이행하고자 했다. 변호사는 엇나가려는 충동에 몸을 내맡기기보다는 ‘신의 명령’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의지로 선을 실천하려 노력한다. 변호사의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들은 바틀비라는 비현실적인 인간을 종교적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자신의 자유의지와 자아실현 시험의 결과였다.
"이제 둘 중 하나라네. 자네가 뭔가 하든지, 아니면 자네에게 뭔가 가해지든지 말이야. 자, 자네 어떤 직종에 종사하고 싶은가?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다시 필사하는 일을 하고 싶나?" “아뇨.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포목상의 점원이 되는 것은 어때?” “그 일을 하면 너무 많이 갇혀 있게 돼요. 아뇨, 저는 점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 "너무 많이 갇혀 있다니, 아니, 자네는 늘 스스로 갇혀 살지 않았나!" "점원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의 대꾸는 단번에 그 하찮은 일들을 일소하려는 듯했다. (중략) "그럼 여행 동반자가 되어 유럽에 가는 것은 어때? 집안 좋은 젊은이의 말 상대가 되어주면서 말이야... 어떤가?" "전혀 아닌데요. 거기엔 무언가 확정적인 게 없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고정적인 게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 81 (중략) "바틀비, 자네 지금 나와 함께 내 집에 가겠나? 내 사무실 말고, 내가 사는 집에 말이야. 우리가 한가한 때에 자네 편의대로 계획을 확정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는 거야. 자, 지금 가세, 지금 당장." "아뇨.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변호사의 수많은 제안을 끝없이 거절하는 바틀비 특유의 말투는 많은 궁금증을 끌어낸다. “하지 않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 수도 없이 많은 거부 표현 중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뭔가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유독 눈에 띄는 건, ‘택한다’라는 단어이다. ‘선택’은 이 책을 관통하고 있었다. 변호사도 분명 주도적으로 선택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를 증명하고자 했지만, 이는 종교관에 의한 선의 실천으로 보인다. 변호사의 선택은 신과 종교관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와 다르게 바틀비는 선택에 있어 집착과 광증마저 느껴진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 속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 직업, 거취, 삶을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바틀비는 어째서 선택에 집착하게 된 걸까.
노동자의 삶
-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바틀비에 대해 적잖게 마음이 풀렸다. 그의 안정성, 어떤 유흥도 즐기지 않는 점, 부단한 근면, 놀라운 침묵,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는 몸가짐 때문에 그는 내가 획득한 귀중한 인물이었다. -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그가 항상 그곳에 있었다는 것, 아침에 제일 먼저 와 있고, 하루 종일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밤에도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의 정직함에 대한 남다른 신뢰가 있었다. 매우 중요한 문서가 그의 손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놓였다.
필사라는 일은 꽤 높은 강도의 노동력이 요구되지 않았을까? 변호사는 엄청난 분량의 필사를 쉬지 않고 미친 듯 해내는 바틀비를 좋은 직원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정직하고 근면하며 성실한 면모는 이상적인 노동자 자질이었고, 바틀비는 이에 부합하는 인재였기에,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고 검증이라는 업무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변호사는 바틀비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노동자로서 귀중한 자질을 드러내는 바틀비가 노동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바틀비가 문제가 있는 인물로 부각되게 만드는 발언,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노동자라면 누구나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노동에 대한 저항심과 억눌린 욕구의 표출로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반복하는 기계적이고 고된 업무를 하며 '일하기 싫다.'라는 마음을 품지 않는 이가 어디 있을까. 자본주의라는 배경에서 고용인을 면전에 두고 노동자의 입에서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발언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나머지 충격적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꽉 막힌 곳을 뚫어주는 통쾌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어떡해야 하지? 내 양심은 내가 이 사람, 아니 이 유령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지? 나는 그를 쫓아내야만해. 그는 떠나지 않으면 안돼. 하지만 어떻게? 그를 강제로 밀어내진 않을 거라고? 불쌍하고, 창백하고, 소극적인 인간, 그런 의지가 없는 녀석을 문밖으로 내쫓지는 않겠다고? 그런 잔인함으로 너 자신에게 불명예를 초래하지는 않겠다고? (중략) 뭐라고! 설마 경찰을 불러 그에게 쇠고랑을 채우게 해서 그의 무해하고 창백한 얼굴을 구치소로 보내진 않겠지? 그러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되도록 할 수 있다는 거지? 부랑자...가 아닌가? 뭐라고!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그가 부랑자요 방랑자라고? 그가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 때문에 너는 그를 부랑자로 치부하려는 거로군.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야.
변호사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을뿐더러 사무실 운영에 방해가 되는 바틀비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때는 노동의 화신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는 바틀비를 내칠 이유는 진작부터 존재했지만, 변호사의 양심은 바틀비를 계속해서 가엾게 여기고 보살펴줘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억지스럽게 보일 만큼 바틀비를 사랑으로 감싸고 도우려는 모습은 자신의 양심과 자기애를 충족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선인들 어떤가. 또한 누가 위선을 위해 이렇게 고뇌에 빠져 치열히 고민하던가. 그 어떤 고용인이 일하지 않는 노동자를 해고할 때 이런 고민을 하던가. 변호사의 독백은 마치 모든 고용인에게 '부디 모든 노동자를 긍휼히 여기고 쉽게 내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더 이상 바틀비와 같은 사람을 만들지 말아 달라고, 생계를 잃고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자가 될지, 조금 더 아량과 이해를 베풀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지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오늘도 밥을 안 먹는답니까? 아니면 먹지 않고도 사는 겁니까?" "먹지 않고 산다오." 나는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아! ... 아주 잠들었군요, 그렇죠?" 나는 중얼거렸다.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결국 변호사는 자신의 손으로 바틀비를 부랑자로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사무실을 이사하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바틀비는 툼스 구치소로 보내졌다. 변호사가 찾아간 구치소에서 바틀비는 조용히 죽음으로 맞이한다. 바틀비가 죽고 몇 달 후, 변호사는 그에 관한 소문을 듣는다. 바틀비는 워싱턴의 사서(死書) 우편물 계급의 하급 직원이었는데, 관련 행정기관에서 갑작스레 그를 해고했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바틀비의 인상에서 주검같이 느껴지던 창백한 우울의 근원에 단서를 제공한다. 사서(死書)라는 이름처럼 갈 곳 잃은 죽은 편지를 다루며 그 처지를 자신에게 투영한 탓일지도 모른다. 바틀비는 결국 죽은 편지와 같은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소문은 왜 그리도 바틀비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떠올리게 만든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는 행정기관에 의한 부당한 해고에서 시작되어 선택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게 된 게 아닐까. 이 선택에 대한 집착과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는, 구치소에 들어간 후 식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하지 않았나. 이야기의 끝에서 나는 바틀비를 노동자에게 깊이 새겨진 고독과 억압이 투사된 존재로 바라보고 있었다.